우리 사회는 관계 중심적인 사회다. 정이 중요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개인이 달라진다. 관계 중심적 사회에서 우리는 ‘관계’에 질식되고, ‘관계’에 끌려 다녔다. 관계의 중압감에 짓눌리다 못해 ‘관계’라는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심지어 여러 개의 자아를 당연한 듯 지니고 살았다. ‘정’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가 최근까지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한 동아리에서 템플스테이를 왔다. 1박 2일 동안 그들은 그 어떤 자체 프로그램도 진행하지 않았고, 동시에 사중에 그 어떤 프로그램도 요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일임되었다. 식사 외 모든 시간은 자유 시간이었다. 단체로 오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숙식 제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동아리 회원은 아니지만 템플스테이에 참가하고 싶어서 온 사람들도 있다고 했지만, 적잖이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이번 템플스테이의 목적은 푹 쉬는 것 즉 힐링이라며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고 인솔자는 내게 말했다. 인솔자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당혹감에 약간의 불쾌감이 더해졌다. 아주 미미했던 그 불쾌감의 정체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듯한 기분?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듯한 느낌?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무시당했다고 나는 느꼈던 것이다. ‘무시당한다’ ‘대접받는 기분’ ‘남들이 나를(혹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체면’, 이런 것들은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들은 ‘우리’라는 정서를 공유하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듯 보였고, ‘우리’ 라는 것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관계보다는 개개인을 더 중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는 존칭어나 경어의 사용을 매우 엄격하게 따진다. 그럼에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다. 그러나 요즘 들어 물건에게도 존칭어를 쓰거나, 굳이 쓸 필요가 없는 경우에도 존칭어를 남발하는 사례가 아주 흔하다. 이는 관계 중심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편 대학생들 중에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고 기피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친구들과 술 마시며 자연스럽게 풀었을 문제들을 상담센터에 가져와서 상담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라고 한다. 불과 30여 년 사이에 대학의 풍속도가 엄청나게 변했다.
한편, 1인 가구와 독거노인의 급증 같은 현상들이 IMF 이후부터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탈관계화 및 개인의 고립은 코로나-19를 거치며 공공연하고 전방위적이고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관계성이 약화되는 조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관계 중심의 사회에서 개인 중심의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 일찍이 없던 일이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붕괴된 것도 채 반세기가 되지 않은 일인데, 이제는 우리 사이를 이어주던 끈끈한 관계성마저도 끊어지고 있다. 어느새 우리는 개인의 영역이 방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간접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SNS를 통한 관계, 관계의 상품서비스화, 가상현실의 일상화 등에 적응 중이다.
그들이 템플스테이를 다녀가고 얼마 되지 않아 내게 문자가 왔다. 구글에서 제공하는 설문조사 기능으로 템플스테이 참가 소감을 설문조사한 결과였다. “템플스테이에 무척 만족했고, 다음에는 체험형을 하고 싶다”는 것이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아주 세련된 설문조사 결과 보고서를 받아 든 내 마음은 매우 복잡미묘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코로나-19 이후 내 앞에 펼쳐질 세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며칠 전에 내가 경험했던 젊은 세대들은 개인 중심적 라이프 스타일에 상당히 적응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관계 중심적 정서에 매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에 뒤처져서 ‘라떼’를 남발하는 꼰대로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자면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변화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출처: 광주일보<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