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국전시회 및 첫 시집 『이방인의 소묘』발표
- 트빌리시의 이방인으로 지독한 고독과의 사귐
- 타고난 시인의 감성이 투사된 정갈하고 아련한 그리움의 세계
- 기존의 화풍에 더해진 수백 점의 아크릴화와 추상화
- 작고 약하고 허름하고 쓸쓸한 것들에 대한 애정의 시선
▲ 트빌리시 이후 그의 사인이 영문으로 비뀌었다.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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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고독 속에 침잠한 트빌리시에서의 하루하루
비 내리는/ 남루한 저녁 마르자니쉬빌리 거리를 걷는다/ 오랜 세월 거리에 서 있는 플라타나스가/ 바람에 온 몸의 먼지를 털어낸다/ 이방인의 외투 주머니에는 버리지 못한/ 구겨진 종이가 부스럭거린다./ 버리고 떠나야만 하는 쓸데없는 것들을 힘껏 움켜쥐고 있는 것이 인생인가/ (중략) / 등 뒤로 무언가 나를 토닥거린다/ 블루가 씩-하고 웃고 있다/ 저녁과 밤 사이/ 그 순간의 블루가 서 있다. (시화집 『이방인의 소묘』 ‘저녁과 밤사이 그 순간의 블루’)
지나치게 바쁜 일상을 살아내느라 몸과 마음이 지치고 여유가 없어졌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일이 아니라 살아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지아의 트빌리시로 떠밀리듯 떠나갔다고 한다. 한희원 화가의 이야기이다.
지난여행 중 들렸던 조지아(舊 그루지아 공화국)의 트빌리시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재정시대의 고혹적 풍경을 하고 있는 그곳의 아날로그식 환경은 쉼을 얻기 위해 충분히 조용한 곳이다. 허름한 골목의 거리에서 언제나 흘러나오는 음악은 그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그는 2019년, 1년의 안식을 기약하고 가벼운 행장을 챙겨 홀로 트빌리시로 향하였다. 자처하여 갈망하던 고요한 시간이 왔다. 그러나 ‘저녁과 밤사이 그 순간의 블루’에서처럼 그는 주머니 속 구겨진 종이를 버리지 못했던 것일까? 여러 사람들과 북적되며 지낸 생활에서 갑자기 혼자 남게 된 지독한 적막의 시간들이 죽음보다 깊은 형벌처럼 다가오며 외로움을 앓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생활의 불편함과 집안일들, 생활용품이나 화구 구입의 어려움 등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들도 그에게는 고독과도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호주머니속의 종이를 버려버리고 ‘밤과 저녁 그 사이의 블루’와 친구가 되어 토닥임을 받게 되었다. 친구 블루는 내면 속의 또 다른 한희원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몸서리치는 고독을 껴안고 내면의 자신에게 침잠한 가운데 트빌리시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규칙적인 저녁 산책을 하며 동네를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온종일 작업에 몰두하였다. 매일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붓을 자유로이 부리게 되었고 그간 하지 않았던 여러 기법들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원했던 트빌리시로의 자유에의 도피는 한 곳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와 같은 자유였다. 스스로가 만든 동굴 속에서 그는 외로움을 붙들고 작업한 360점의 그림과 70여 편의 시를 가지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걸어 나왔다.
▲ 다양한 아크릴 그림들, 타일처럼 전시회장 벽면에 빼곡히 붙여 놓았다. 트빌리시에서의 색체는 자유를 닮아 더욱 강렬하고 밝아졌다.©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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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시대에서 트빌리시시대까지 - 한희원 그림의 자취
45년간 화가의 길을 걸어온 한희원의 회화사에서 전환적 시점을 일별해 본다면 다섯 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민중미술에서 시작하여 순수회화로 성공적으로 전환한 몇 안 되는 화가이다.
초기- 민중미술시대
1975년에 화가의 길을 걷게 된 한희원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암흑기인 1980년대 까지 민중미술활동을 했다. 기독교의 영향아래 성장했던 그는 대학시절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불공정한 사회를 그림으로 고발하였다. 대학교 4학년 때 그린 ‘가난한 사람들’(1978)은 당시에 크게 주목 받았는데, 억압받는 민중들의 고통스런 얼굴을 무채색으로 표현한 5미터 이상의 대작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광주목판화연구회’, ‘임술년’ 등의 진보미술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장터전’(‘81-’91, 구례, 화계, 광양, 순천 등)에 참여함으로서 ‘민중미술은 민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그의 의지를 실천했다.
▲ 가난한 사람들’ 190x500㎝ oil on canvas 1978년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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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시적 내면의 서정적 시대
화가의 길을 가면서도 시인들과 교류하며 시를 써온 그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그간 가슴 속 깊이 들어있던 시적 서정의 자아를 그림 속으로 옮겨왔다. 선천적 감수성을 지닌 그에게는 그림보다 시가 먼저 찾아왔었다. 미대에 진학하기 전부터 시 쓰기를 갈망했던 그는 문청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서정적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적 그림은 그의 최초의 별 그림이며 시적인 풍경들로 채워진 ‘여수로 가는 마지막 기차(1993)’였다. 이 그림은 한국미술계에 그를 각인시킨 큰 성과를 거두었고 이후 그의 그림은 인간의 내면을 시적 서정성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채우며 많은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마음의 감성을 자극해 주었다.
▲ '여수로 가는 마지막 기차'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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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거칠고 투박한 서정의 시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로 들어오면서 서정적인 풍경과 정물화 등에 다소 거칠고 투박한 붓 결이 나타났다. 시적 서정의 세계 위에 내면적 자유를 더한 듯한 대담한 터치는 때로는 두터운 마띠에르 기법으로 사물의 형체가 없는 듯 하면서도 명확히 존재하는 해체와 결합이 공존하는 예술성을 보여주면서도 아련한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유화임에도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느낌을 주는 고요한 정신세계를 다양하게 표현해내었다. 또한 캔버스라는 장소를 떠나 오래된 창틀이나 나무, 도마 등의 버려진 오브제 위에 표현한 그림들은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을 떠올려주었다.
▲ ' '바람을 따라 길을 걷다 ' (2002). 출처 -다음©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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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후, 직접적 소통의 시대
한희원은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양림동에서 살아왔다. 양림동은 광주 근대사의 거점지역으로 문학가와 음악가. 화가 등 예술가와 교육자들이 터전을 일구었던 곳이다. 2015년 7월 그는 양림동의 옛 정취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곳에 ‘한희원 미술관’을 열게 된다. 양림에 남아있던 예술혼과 서정적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한 이 시도는 양림동을 문학과 예술의 메카로 전국적으로 알리는 시발점이 되었다. 전국에서 20만 명이상의 관람객들이 ‘한희원 미술관’을 방문하였고 이는 그가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화가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각종 언론에 칼럼을 쓰며 작가로서의 소통도 활발하게 진행하게 된다. ‘한희원 미술관’에 가면 양림동 재개발로 철거된 집의 창틀에 그가 그린 사라진 옛 양림의 정취가 걸려있다.
2019년 이후 트빌리시시대
수많은 사람들과 일정에 둘러싸여 지쳐간 그가 쉼을 위해 찾은 트빌리시, 그는 지독한 적막과 고독 속에서 종일 그림 작업에 몰두하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오롯이 그림그리기에 사용한 그의 작업량은 방대하였다.
화구구매의 어려움 탓에 체류초기에는 콩테를 사용해 세밀하게 그려보는 작업을 하였다. 캔버스에 그린 유화는 귀국 시 운반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종이와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크릴 물감은 처음이었지만 익숙해지면서 360여점의 아크릴 화를 그렸다. 고통스러운 고독 속에서의 자유를 붓끝으로 마음껏 누리며 기존의 양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시도했다. 또한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슬픔 속의 평화를, 고독 속의 자유를 표현하며 시적 서정성 위에 또 다른 영혼을 불어 넣었다. 기본적 드로잉에서부터 대담한 터치의 붓놀림과 추상화까지 그릴 수 있는 것을 다 그리며 화풍의 변화를 시도한 그는 트빌리시에서 새로운 미술적 화두와 화풍을 이끌어내었다.
시인 한희원, 첫 시집 『이방인의 소묘』
한희원의 그림에서는 시가 읽힌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그가 시를 계속 써온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는 그림보다 시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광수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었던 아버지(고 한이직)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유년시절 잦은 이사와 부친의 병환은 본태적 고독 속의 그를 서정적 감성으로 이끌며 가슴 속에 시의 씨앗를 심어주었다. 특히 재수시절 시가 몹시 쓰고 싶어 국문과에 진학해 시인이 되길 꿈꿨으나 인생은 그를 미대로 이끌었다. 그는 미술공부를 하면서도 늘 시를 가까이 했으며 교편을 잡았을 때도 꾸준히 시를 썼다. 특히 순천지역에서 곽재구 시인을 비롯 여러 시인들과 교류하며 ‘순천문학’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번에 낸 시화집 『이방인의 소묘』는 1987년 등단한 이후 35년 만에 낸 첫 번째 시집으로서 지난 6월 11일 <광주 문화공원 김냇과>에서 귀국전과 함께 발표하였다. 시화집에는 100여점의 그림과 함께 총 86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시 86편중 41편은 트빌리시에서 고독과 사투하며 매일 일기처럼 쓴 70여편의 시중에서 선별하였으며 나머지 45편은 기존에 써두었던 시에서 추렸다. 277페이지에 달할 정도의 두꺼운 두께로 많은 그림들이 실려 있다.
곽재구 시인은 표4에서 “(상략) 삶에 대한 진정성과 꿈. 나는 비로서 그의 그림에 매료되었고 찰나에 동무가 되었다. 희원의 그림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그림 속에 스민 촉촉한 시정이라 할 것이다. (중략)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립고 쓸쓸한 풍경들이 이국의 저녁 공기 속에 사람의 그림자를 흔든다. 그 어떤 결핍도 콤플렉스도 다 사랑 할 것 같은 이승의 시들. 여기 그림과 몸이 하나인 사내가 있다. 이제 그는 그림과 시가 한 몸인 꿈을 꾼다. 맑고 가난한 영혼을 지닌 세상의 외로운 혼들이 그의 시와 그림 속에서 생의 따뜻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략)”는 말로 시인 한희원의 시집 발간의 소회를 밝혀주었다.
▲ 수묵화 같은 아크릴 작품들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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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당의 형체가 주위의 풍경들과 혼연일체가 되었으나 본래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두꺼운 마띠에르로 표현된 작품이다.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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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만남 – 시, 화, 삶 속에 배어있는 따뜻한 인간미
귀국 전시회는 7월 11일까지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8월까지로 연장되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김냇과’에서 마주친 한희원 화가는 광주에 내린 폭우로 양림동 ‘한희원 미술관’에 물이 들어차 오전부터 내내 물푸기 작업을 하느라 기진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여 주었고 조금 엉뚱한 질문에도 따뜻한 눈빛으로 이해해 주었다.
<시집> 시력에 비해 시집이 너무 늦게 나왔다며 시화집에 대해서 물었다. 시화집을 내는 작업은 몹시 고단하였다고 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며 시화집에 수록 할 많은 양의 그림과 시를 일일이 선별해야하는 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전시회 오픈 전에 탈진상태였다. 그렇지만 첫 시집을 내는 일이어서 신중하고 즐거웠다. 이정도 두께의 시화집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작> 시와 그림 작업의 비율에 대한 질문에 “그때그때의 느낌에 따라 어떤 것은 시로 나오고 어떤 것은 그림으로 나온다. 매일 그림을 그리지만, 시는 시심이 떠오를 때 마다 쓴다. 굳이 비율을 말하자면 그림으로 나오는 감정이 8, 시로 나오는 감정이 2 정도라고 볼 수 있다”며 “절대고독 속에서 쓴 트빌리시에서 쓴 시에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별> ‘별은 무슨 의미인가?’물었다, 그는 “별은 그리움이다.”라는 간결한 시어로 답하며 “고흐나 윤동주 같이 별을 그리는 사람들에게 공동적인 별의 의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 그리움이나 생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세계 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태생적 고독과 그리움에 관한 그의 천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의 외로움은 개인을 넘어 이웃과 시대의 고독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그린 최초의 별 그림인 ‘여수로 가는 마지막 기차’는 광주에서 여수로 식구들을 만나러가는 밤기차에서 별을 바라보는데,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와 밤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밖의 논두렁이 뱀처럼 구불거리는 게 순간 무서워 엄마의 품속으로 달려 들어갔을 때 본 별과 겹쳤다고 한다. 가슴 속 한 켠에 묻어둔 그리움의 별이 어느 날 문득 떠올라 그에게 비쳐주는, 그에게 별은 여전한 그리움이며 그림의 원천이다.
<블루> 푸른색을 이보다 아름답게 사용하는 화가는 드문 것 같다. 농도와 채도, 마띠에르를 달리하며 그의 그림 속 푸른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온통 블루 한가지의 색체를 사용한 그림들은 맑음과 안정, 젊음과 가능성, 평화와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블루는 쓸쓸하지만 우울하지 않다. 트빌리시에서 그린 푸른색이 기존의 푸른색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트빌리시의 물감과 종이가 한국에서 썼던 것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는 주로 아크릴 물감을 사용했다. 아크릴 속성이 찐득하고 빨리 마른다”고 대답하여 주었다.
<아크릴> 트빌리시에서 처음으로 아크릴을 사용하였다. 아크릴은 유화를 그리던 그와는 잘 맞지 않은 물감이었다. “트빌리시에서 화구구입의 열악한 여건으로 아크릴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아크릴은 현대작가들이 자주 쓰는 물감이다. 유화랑 너무 달라 처음에는 잘 안 맞았지만 매일 쓰다 보니 익숙해지고 지금은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었다. 화가는 어떤 재료든 다 쓸 줄 알아야 한다. 그 점에서 트빌리시는 내게 소재의 다양성을 가져다주었다”
▲ 트빌리시에서의 작품 관리법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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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삶에 지쳐 자처한 트빌리시의 생활은 지독한 고독 속에서 힘겨웠지만 귀국 후 지나치게 바쁜 생활은 그를 또 힘겹게 만들었다. 그는 “귀국 후 다시 복잡해진 날들로 매우 지쳐있다. 다시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 쉬고 싶다”고 전했다. “삶에서 일과 쉼의 균형이 귀중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쉽지 않다. 성품과 천성을 바뀌는 건 어렵지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중용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토로했다.
<색> 그의 그림에는 노란색과 블루가 많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 이유는 그 색의 강열함이 각인을 쉽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초창기 때의 그는 흰색과 회색 등 무채색을 많이 사용했다. 좋아하는 색을 물었다. 지긋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는 모든 색을 좋아한다. 밝고 경쾌한 노란색도 그림 안에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슬프게도 보인다.”는 다소 時論的 답을 내어놓았다.
<작가론>그는 “뛰어난 예술가는 태생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영적인 창의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미술 기법을 배우는 것보다 영적 알아차림이 중요하다. 고정 관념에서 탈피하고 지식에 갇히지 말고 더 넓은 영적인 세계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예술에서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며 “화가의 길을 택했다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숙고하고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말아야한다.”는 말로 화업을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단단한 각오를 주문했다.
에필로그
마주 본 그의 눈동자에는 원초적 슬픔과 아련한 추억,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깊이 자리해 쓸쓸하였으나 따뜻함이 묻어있다. 표정과 목소리의 톤, 태도는 과장됨이 없었고 편안하고 고요했다. 그의 정갈한 영적침잠의 내면과 겸손함이 몸 전체에 서려있다. 그의 그림들이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데도 아프지 않고 아름답게 발현 되는 것은 그의 마음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따뜻한 인류애 때문일 것이다. 트빌리시 이후 자유스러움과 평화가 더해져 밝아진 그림들은 사물이나 마음이나 사람들의 작고 하찮고 가난한 것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대하는 그의 성품을 닮아 있었다.
청마 유치환과 곽재구, 박남준을 좋아한다는 시인 한희원, 그의 그림에서는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같은 쓸쓸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들에 대한 애잔함이 배어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시집에 사인을 해주는 한희원 시인 © 이미루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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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냇과에서 열리는 ‘트빌리시 귀국전’은 8월 까지 진행되며 지하 1층과 1층 , 2층의 전 공간에서 전시되고 있다. 특히 지하공간에 걸린 그림들은 트빌리시에서 종이에 그린 그림들을 액자 없이 대형 타일처럼 이어 붙여 전시한 형태로 트빌리시에서 그려진 이국적이고 다양한 주제의 그림들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앞으로 트빌리시에서 만난 영적인 자유와 표현적 자유를 나만의 것으로 풍부하게 그림 속에서 나타내보고 싶다”는 지친 그에게 우선 혼자서 쉼의 여행을 떠나라고 떠밀어보고 싶어진다. 또다시 짙은 고독 속에 갇힐 지라도.
* 전시회장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을 올려 그림의 색체나 분위기가 원본과 다른 분위기를 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