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남숙 시인
모래톱
김남숙
길게 빼고 있다
숱한 활자가 모인 저 긴 혀
쏟아내기 직전의 먹빛 구름처럼
무겁게 모인 각진 글자
금방이라도 쏟아부을 기세다
하나같이 반짝이는 초판 잡지의 표지처럼
혓바닥 가득 바늘이 돋아
조그만 바람에도 허공 여기저기를 찌른다
뽑아낼 수 없는 고통
기생과 공생의 기막힌 동거
손톱에 박혀 죽을 때까지 붉은 피를 쏟는
가시 우거진 아파트의 철책이 긴 선으로 이어져 있다
밖은
듣지 못하거나 말하지 못하는 족속이 사는 곳
체념이 습관처럼 목을 감는 유혈목이나
저녁마다 목이 길어지는 짐승의 그림자거나
새벽부터 깨알 같은 활자를 모으고 다니는
어떤 노인의 등 뒤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가는 오늘의 나이거나
안다
넘어가서는 안 될 선이 있다
빼앗아가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시간은 혀를 키워 입 밖으로 내올 것이고
더 각진 문장과 책들을
혓바늘에 꽂힌 채 솟대로 세워질 것이다
하구로 서서히 밀려 내려가는 혀 멀리
공부방 작은 불빛 끌고
다가오는 배 한 척
가운데 커다란 연필을 깍고 세우고는
ㄱㄴㅁㅇ
파란 종이에 써가고 있다
어두워지자
심만 남은 배를 끌고
죽은 바다로 점점 떠내려가고 있다
불면의 유리
김남숙
꽃이 핀다는 건 슬프다는 거야
슬픈 이야기는 살갗을 조이며
아무렇게나 흔적을 남겨놓거든 어둠처럼 묽은 빛깔로 변하거든
어제도 별 하나 사라졌어
사라지는 별과 함께 오래 지낸 적 있는데
어김없이 넌 풀꽃처럼 자고 있었고
난 바람처럼 맴돌다 꽃으로 누웠어
낮 동안 난 붉은 심장을 가졌어
그 심장은 언제든 터질 준비가 되어 있고
방아쇠에 늘 걸지를 걸고 있지
화약이 터지면 내 붉은 피가 빛처럼 빠르게
네가 보이는 언덕에 밝게 새겨지는 거야
언덕이 아니어도 너는 어디라도 갈 테고
난 널 따라갈 테니 문제는 없어
밤에는 매일 퍼렇게 멍드는 가슴을 쏘고
나비 수국 꽃잎처럼 흔들리는 거야
꽃이 진다는 건
아픔이 끝났다는 의미야
그래서 난
아직 밤낮으로 피어있나 봐
*<평설 / 이광희 시인>
사진/ 이광희 시인
김남숙 시인의 언어에는 뜨거운 힘이 감지된다. 마치 언어적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는 숫돌 하나를 사유의 바닥에 놓고서 마찰 면과 물이 서로 조응하듯이, 현란한 빛과 날카로움으로 언어적 표층을 돋보이게 드러낸다. 김 시인은 자신의 분망한 삶속에 녹아있는 질료들을 가감 없이 추출하고 핍진한 마음눈으로 투시하는 과정 속에서 궁극의 현실을 극복한다.
어차피 인간은 자연을 극소화한 점박이 존재에 불과하다. 시인이 시적 언어로 만나는 순간, 그 위대한 자연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초탈범주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김 시인이야말로 삶과 자연이 관통하는 창조적 공감능력으로 수사적 책무를 다하는 모습이다.
그에게 있어 시는 오래도록 육화된 내상의 언어를 소통의 언어로 변주하는 장치이다. 그만큼 시인의 서사적 구조에는 현실적 자아와 외부세계와의 미적 거리에서 객혈의 언어가 숨겨져 있다. 이런 파상의 언어에 숨겨진 미학적 위반의 세계의 분명하게도 수신호를 보내는 것은 결국 독자일 것이다.
대자연의 조소하는 아름다운 침식작용과 풍화작용과도 같이 자신을 해체하는 묵언수행의 길에서 대중적 화소를 확장해 가려는 김 시인만의 미학적 소통방식은 분명 오래도록 시적 울림으로 이어가리라 믿는다
김남숙 시인은 이렇게 언어에 숨겨진 미학적 위반의 세계를 넘나들며 더욱 긴장된 언어로 갈피마다 서정적 공감대를 확보할 힘이 남아있다. -이광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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