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스탄불에는 오래된 건물보다 더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이 있다. 고궁을 배경으로 붉게 물들어 가는 햇무리. 7개의 구릉에 계단식으로 세워진 건물들. 수평선 너머 도시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과 사원들.
이스탄불은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로 나뉜다. 유럽 지구는 골든 혼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신지구와 구지구가 마주한다. 아시아 지구와 유럽 지구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가로 지른다. 이스탄불은 골든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를 가운데에 두거나 옆에 끼고 있다. 이곳 항구는 터키 수출입 품목 대부분을 취급한다. 보스포루스 다리는 세계에서 긴 고속 현수교에 속한다(1,073m).
블루 모스크로 가기 위해서는 아파트에서 600m 떨어진 핀데킬로(Findikli) 트램 정거장에서 출발하여 아흐메트 술탄 역에서 내려야 한다. 여섯 정거장이며 16분 걸린다. 이스탄불에 머무르는 동안 이른 아침 블루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자주 보러 갔다. 은은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새벽녘 건물은 영혼이 깃든 듯했다. 조명이 꺼지는 7시에 트램을 다시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어느 날은 블루모스크에서 돌아오는 길, 바닷가로 나가봤다. 정거장에서 30초만 걸으면 된다. 도착하고 나서야 진즉 올 걸 후회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바로 발아래에서 출렁거렸다. 비릿한 바다 내음도 없었다. 연속 밀려오는 파도. 그 소리. 떼 지어 날거나 앉는 비둘기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현지인. 해협을 가로지르는 페리. 그곳은 노천 식당이었다. 노천 테이블에서 8리라 터키 커피와 15리라 저민 빵을 주문했다. 5분이나 흘렀을까.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수평선에서 붉은 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8시 25분부터 완전히 수평선 위로 올라왔을 때인 8시 32분까지 벅차오르는 가슴을 눌러야 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이스탄불에서의 열흘을 보내고 있을 때 한국에서 예약하고 온 드레비시 세마 댄스 공연을 보러 갔다. 한 시간 공연이었을 뿐인데 내가 터키에 온 이유가 ‘이곳’에 앉아 있기 위해서인 듯 60분이 열흘 동안의 시간과 견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2. 드레비스 세마 댄스(Whirling Dervishes Dance)
이곳 현지인들은 세마(Sema) 댄스라고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데비쉬(드레비시, Whirling Dervishes)’라고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세마는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명상 춤’을 말한다. 세계에서는 우주와 일체를 이루고자 하는 다양한 명상 댄스가 존재한다. 터키 중남부에 있는 코니아(Konya)에서 시작된 세마 댄스의 정확한 명칭은 드레비시 세마 댄스가 된다.
이 춤의 창시자는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 수피즘의 선각자인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 1207~1273)이다. 그를 따르는 수도승들을 드레비시라고 불렀다. 터키어 발음으로는 ‘데비쉬 댄스’이다.
드레비시 세마 댄스를 추는 사람을 ‘세마젠’이라고 한다. 세마젠들은 외부의 억압(다음호에 다룰 것이다)에도 불구하고 800년 동안 이 춤을 보존해왔다. 이 춤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13세기 중엽 셀주크 투르크 제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당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십자군 전쟁과 몽골 침략으로 혼란스러웠다. 혼란한 시국에 수많은 사상과 철학이 난무했다. 이슬람 내부의 분파적 모습과 현학적인 논쟁에 염증을 느낀, 뜻있는 무슬림들은 아예 현실을 회피하고 수행에 전념하기로 한다. 그들은 ‘적게 먹고 적게 마시며 검소한 옷차림으로’ 기존의 권위와 형식에 저항한다. 13세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들을 ‘수피(Sufi)’라고 부른다(‘수피’라는 이름은 유럽에서 왔다). 이들은 명상과 기도를 통해 이슬람의 가르침에 다가가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잘랄레딘 루미이다.
3. 잘랄레딘 루미
잘랄레딘 루미는 1206년 아프가니스탄의 발흐(Balkh)에서 태어났다. 몽골 침략을 피해 가족을 따라 터키 코니아로 왔고 그곳에서 수피즘을 꽃피웠으며 1273년 같은 곳에서 죽었다.
코란은 오해와 왜곡을 막기 위해 다른 외국어로 번역되는 것을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 그 당시 아랍어로 된 코란을 읽는 사람은 엘리트 지배 계층이었다. 소수를 위한 신앙이 된 셈이다.
잘랄레딘 루미는 문맹이 대부분인 민중을 위해 코란을 읽지 않아도 신과 가까워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마침내 회전을 하면서 추는 수련법을 고안한다. 춤을 추면서 자신을 비우고 정화하여 신을 모시는 종교적 수행에 민중들은 환호한다.
그는 위대한 스승이 된다. 위대한 스승을 ‘메블라나’라고 한다. 잘랄레딘 루미 앞에 메블라나가 붙는 이유이다(그래서 세마를 메블라나 댄스라고도 부른다. 메블라나는 현재에도 쓰인다. 드레비시 댄스를 이끄는 노스승을 메블라나라고 한다. 메블라나만 쓰는 원통형 모자로 구별할 수 있다). 학자이며 시인이기도 했던 루미는 죽을 때까지 인간, 우주, 존재, 사랑 등을 주제로 한 많은 시를 남겼다.
현재 이슬람교에서는 메블라나 종파를 이단으로 간주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형제이며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 가운데에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이 읽히고 인용된다.
드레비시 세마 댄스를 출 때 음악은 토착 리듬에 코란뿐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 이 땅에서 무덤을 찾지 말고 인간의 마음에서 찾자.’라는 사색적인 구절이 많은 루미의 시편도 암송된다. 이 음악을 아인(Ayin)이라고 한다.
드레비시 세마 댄스는 춤이면서 춤이 아니다. 고도의 종교의식이다. 한없이 자신의 몸을 회전시키면서 욕망 덩어리인 ‘나’를 비워 신과 가까워지려는 몸짓이다. 그래서 사진 찍는 것도 박수도 잡담도 금지한다.
나는 이런 이유에서 이 의식이 꼭 보고 싶었다. 어떤 종교도 없다. 어떤 종교든 경지에 오르면 서로 통한다고 믿고 있다. 비우고 비워 그곳에 차는 것은 ‘무’가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 신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하는 그런 믿음을 갖고 말이다.
550년 된 호자파사(Hodjapasha)라는 오스만 제국 함만(목욕탕)을 리모델링해서 예술극장으로 복원한 공연장에서 당신의 명상으로 나를 명상시키면서 나를 기꺼이 비워갔다. 8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연장 내부는 옛날 목욕탕 그대로 높은 돔 형태 천장이었다. 둥그런 천장에 빛 한줄기가 지나간 것 같은 그 순간에 고통스러운 몸짓을 덜어내고 비로소 평화로운 기운을 휘장처럼 두른 세마젠들의 춤사위에서 내 자아는 경건해졌다.
나는 같은 공연을 2주 후에 또 예약했다. 귀국하기 전까지 총 세 번을 봤다. 드레비시 댄스 본고장인 코니아까지 가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차노휘
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현재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 사진 설명
▲ © 전남방송-호자파사에 전시된 세마젠 인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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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방송- 드레비시 세마 댄스를 추는 세마젠들. 일반적으로 나이 든 스승(메블라나)과 세마젠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이스탄불에 있는 메블라나 박물관 공연 모습 . 개인적으로 호자파사 공연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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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방송- 드레비시 세마 댄스는 피리인 네이를 불면서 시작한다. 이 소리는 신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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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방송- 목욕탕을 개조해서 만든 공연장인 호자파사. 작은 원형 무대와 높은 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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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방송- 세마젠은 흰색 긴치마 위에 `에고(ego)의 죽음`을 뜻하는 흰색 저고리를 입는다. 무덤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 . 원통형 모자는 묘비를 상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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