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로나바이러스19 그리고 안부
터키가 한국을 잇는 하늘 길을 막았던 3월 1일, 나는 인천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귀국한 2주 뒤 이스탄불에서 묵었던 아파트 호스트가 연락을 해왔다. 내 안부를 묻고 난 그가 에르도안(현재 대통령 이름)이 모든 바와 클럽을 강제로 문을 닫게 해서 실직자가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미술 사학을 전공했고 이스탄불의 교통, 상업, 관광의 중심지인 탁심광장 근처 바에서 바텐더로 근무했다. 종교색채가 강한 그곳에서 ‘자유’를 추구했던 그는 무교였다.
나는 ‘터키’와 ‘코로나’를 키워드로 재빨리 검색을 했다. 그곳을 떠날 때만도 확진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귀국 일주일 전 한국은 대구 신천지를 중심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미 중국인들을 입국 금지시킨 이국땅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눅 든 나는 외출을 자제해야 했다. 불과 2주 만에 상황이 뒤바뀌었다. 나는 궁금했다. 청정지역을 감염시킨 첫 확진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다행하게도 동양인은 아니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자국민이었다.
“그런데 너가 실직당한 것은 안 된 일이지만 에르도안 정책에는 찬성. 너네 나라는 이제 시작일 뿐이야.”
“너 말이 맞긴 한데, 클럽과 바만 금지시키면 뭣하니? 모스크는 금요일마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터키는 무섭게 확진자가 늘었다. 현재, 감염자 16만 명에 사망자는 5천 명에 이르고 있다. 한때 이스탄불은 외출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선거를 무사히 치렀고 K방역은 세계인의 찬사를 받으며 코로나바이러스19를 대처하는 모범국으로 부상했다. 수준 높은 국민의식과 실천뿐만 아니라 훌륭한 리더를 둔 덕분이기도 하다. 가끔 그가 연락을 하지만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자랑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기를 바랄 뿐이었다.
2. 종교지도자였던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gan)
“아니야, 그들은 ‘새 머리’야. 새 머리.”
터키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정치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선박 엔지니어인 M은 아랍인들과 현재 대통령을 ‘새의 머리’라고 단정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종교에 ‘너무 심취’해서 시대를 거스른다는 거였다. 터키인은 무슬림이지만 아랍 민족이 아니다. 돌궐에 그 뿌리를 두었지만 혼혈 정책으로 현재 인종학 상으로는 백인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 대부분 에르도안을 비난했고 2년 뒤 총선에서 패배할 거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들의 국부, 초대 대통령이었던 아타튀르크를 언급하지 않고는 지금의 터키를 말할 수 없어서이다. 지금의 대통령 에르도안은 아타튀르크와 비교대상이 되어 끊임없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특히 젊은 층에서). M이 비유했던 대로 지나친 종교에 심취해 시대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고 있는, 현대의 술탄이 되고자 하는 에르도안. 그는 아타튀르크 흔적을 지우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그만큼 그는 죽었으면서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3. 터키 국부 아타튀르크
‘아타’는 터키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튀르크’는 그들의 종족인 ‘투르크 족’을 말한다. 아타튀르크(Atatürk)는 터키인들의 아버지 즉 국부가 된다. 국부가 된 그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Mustafa Kemal, 1881.3.12.~1938.11.10.)이다.
육군 장교였던 그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자 초대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계급제도 폐지였다. 계급 사회에서는 귀족들만의 특권인 ‘성’을 일반 서민들은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국민에게 패밀리 네임을 주는 운동을 한다. 그때 국민의회가 무스타파 케말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아타튀르크는 각종 개혁정치를 하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는 이슬람 세속주의 정책이다.
그는 제국이 패망한 이유를 ‘너무 심취한’ 종교에서 찾는다.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칼리프 직위를 폐지하고 술탄을 국외로 추방한다. 여성들 머리에서 히잡 착용을 법률로 금지한다. 라마단 기간 중 빠른 퇴근을 없애는 것은 물론 금요일 휴일을 일요일로 바꾼다(라마단 등 이슬람교에 관한 것은 추후에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터키 국민 98.4%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지만 나라의 법이 종교를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라 되레 박해할 정도로 모든 제도에서 종교를 빼버린다.
둘째는 국민 교육이다.
계급사회인 당시 평민은 교육을 받을 수가 없었다. 전 국민 10%만 글자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술탄제가 폐지되었어도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이 아니라 술탄으로 알았다. 민주주의 자체를 몰랐다. 아타튀르크는 국민에게 절실한 것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아랍어 대신 배우기 쉬운 알파벳을 변형한 터키 문자를 만들었다(1929). 학교에 보급하고 전 국민 의무 교육을 실시했다.
셋째는 여성들 인권 신장 기여이다.
의무 교육은 여성에게도 해당됐다. 국민 절반이 여성인데, 그녀들이 집안에만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여성들에게 학교는 물론 군대 문까지 열어주었다. 세계 최초 여성 공군 학교를 설립하여 ‘세계 최초 여성 파일럿’을 탄생시켰다. 1900년대 100년을 빛낸 파일럿 중에 유일한 여성 파일럿이 터키 출신 사비야 괵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공항 이름(Sabiha Gokchen Airport)으로 남아 터키인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현재 이슬람 국가 중에서 여성 사회 진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터키이다.
그는 이렇게 현대 터키의 시초를 마련했지만 반발력도 만만치 않았다. 몇 백 년 동안 피부처럼 둘렀던 히잡을 여성들 머리에서 벗겨낸다는 것은 조선말 단발령 시행만큼이나 폭력적인 것이었다. 학교를 다녀야 했던 여성들은 히잡을 두른 뒤 다시 가발을 쓰고 등교를 했다. 군대도 마차가지였다. 아타튀르크는 종교와 인습에 갇힌 여성들을 양딸로 삼아 적극적으로 교육시키면서 전문인으로 성장시켰다. 머리카락을 다 드러낸 전문 여성을 언론 등에 노출시키며 사회진출을 독려했다.
그는 의아할 정도로 전통을 억눌렀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 전통복도 벗겨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성공시켰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만이 할 수 있었다.
왜 그는 그렇게 몇 백 년 동안 유지됐던 종교적 인습 등을 뒤집어엎는 데도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까, 왜 그는 전통(종교)을(를) 그렇게나 억눌러야 했을까. 아타튀르크와 터키는 개인적으로든 시대적으로든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 아픔이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편집자 주
실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 삶에 균열이 생기면서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인생에게 불만스럽게 물었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니?” 그러자 인생이 말했다. “떠나보렴! 네가 구축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말이야.” 인생은 내게 여행을 떠나라고 종용했다. 떠났다! 그리고 알았다. ‘여행이 답’이었다는 것을.
이 글은 ‘여행이 답’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터키에서 한국으로 직항하는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어야 했던, 2020년 겨울 동안 이스탄불을 베이스캠프 삼아 터키를 여행했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다. 한국보다 7배나 넓은 그곳은 지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축복 받은 나라였다. 축복 받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작가 차노휘
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현재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