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을 찾아서
양인숙(아동문학박사)
3일 8일은 화순장날이다. 구경삼아 오일장을 가는 것을 좋아한다. 오일장이 궁금하고 구경하고 싶은 정서가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어려서의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요즘 새삼 느낀다. 요즘은 어려서부터 마트, 마켓을 다니기 때문이다.
요즘 생산되는 채소며 과일 생선, 등 화순장은 시골장 답다. 뒤따라오던 남편이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진다며 뭐 좀 먹고 가야겠다는 것이다.
순간 어릴 적 생각이 번득 났다. 우리는 어머니 따라 시장에 가도 별 소득이 없다. 어머니의 주머니가 두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라 가 본 적이 별로 없다. 어쩌다 한번 무거운 짐을 들고 가야 한다며 들어다 줄 것을 청했다. 어머니를 따라 무거운 것을 낑낑대고 들고 갔는데 세상에, 목적지에 도착한 어머니는 ‘이제 되었다. 어서 집에 가그라’ 그 말씀에 다리에 힘이 쏙 빠졌었다. 부풀었던 풍선에 바람 빠지듯.
다리에 힘이 빠져 못 가겠다는 것을 어찌 할 것인가? 뭘 먹을 것이냐고 하니 꽈배기를 들었다. 두 개에 천원이란다. 하나는 입에 물고 하나는 비닐봉지에 담아들고 내가 가고자 하는 자치샘까지 따라오는데 어찌나 웃음이 나오는지, 내가 키득거리며 웃자 뭐가 그리 재미있냐고 반박이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나야 천원어치 얼른 사 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돌려보내던 어머니 마음은 어땠을까? 무거운 짐을 들어다 주었지만, 엿가락 하나 쥐어주지 못하고 돌아서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눈물짓지는 않았을까?
그 때는 정말 멋모르고 지나왔지만 내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다보니 새기고 생각할 일이 참 많더라는 것이다. 자치샘을 찾아가고 있는 이유도 어머니 말씀 때문이다. 여자가 몸을 정갈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 주신 말씀.
‘화순에 자치샘이라는 곳이 있는데 새벽에 물을 길러 갔다가 참외가 물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먹었다가 잉태를 하여 아이를 낳았단다. 나도 외할머니가 이야기 해 주셨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가서 물을 떠 봤는데 그 소리 울림이 매우 맑고 웅장하더라. 그 소리가 속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속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것더라. 여자는 아무것이나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성교육이었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자치샘, 참외, 배씨 처녀, 최씨, 만연사, 혜심, 진각국사, 수선사, 송광사 16국사. 낱말들이 머릿속에서 요동을 친다. 정리를 해 보면 한 문장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처녀는 아무것이나 먹으면 안 되니 몸조심 하거라’이다.
농협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자치샘까지 일부러 걷는다. 걸으며 생각한다. 그 시절, 그 풍경을. 내가 가는 목적을 모른 남편은 꽈배기를 먹으며 차로 와도 되는 곳을 왜 걸어서 가느냐고 투덜댄다. 추억이 있고 없음의 차이다.
문명의 발달, 문화의 변화는 자치샘을 한낱 길가에 조형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도 없으면 길을 확 뜷어서 넓게 했을 것인데, 길 가운데 서 있게 하였다. 물을 뜨면 속을 울리던 그런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물 위에 쓰레기 떠 있는 못 쓰는 우물, 도로에는 방해가 되는 그런 존재일 뿐이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윤동주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윤동주 [자화상] 전문
쓰레기에 가려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찌 되었을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전설, 우물가에서 이어져 왔을 그 전설은 문화가 되고, 그 문화를 바탕으로 우리가 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자치샘을 떠나오는데 전화가 왔다. 오늘 화순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지인이다.
화순은 골이 깊은 곳이 많아서인지 다슬기가 참 많다. 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자란다는 다슬기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시장 구경 겸 읍사무소 앞으로 내려오는데 참외를 파는 곳이 있어 사진을 찍으려 하니 ‘우리 참외 다라지니 찍지 마시오’ 소리에 또 한 번 웃음. 장이란 참 정겨운 곳이다.
맛있는 점심을 사준 지인 부부와 농협에서 헤어지고 나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가 볼 곳이 있다. 아이들 민속 숙제를 해 오라할 때 만났던 민불, 내 기억엔 민불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도로가 새로 나고 지형이 바뀌면서 어디였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다. 내가 봤던 곳도 인터넷을 뒤져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입력 해 둔 주소가 잘 못되어 엉뚱한 벽라리 동네 안으로 안내를 하였다. 다시 기억을 되짚어 서학정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곳에 석재공장이 있는데 거기를 가면 알 듯 했다.
서학정은 배씨 처녀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게 된 것이 부끄러워 갓난아이를 버린 곳이란다. 다음날 아이의 생사가 궁금하여 갔더니 ‘학이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는 곳인데 황당도 이런 황당이 어디 있겠는가? ‘알로 태어나는 학이 젖이 있을까?’ 그래도 전설은 재미있다 그런 ‘황당’에서 오는 재미지 않을까? 정자현판에는 서학정이라 쓰여 있는데 설명에는 ‘학서정’으로 되어 있다. 글자도 다르다. 현판에는 상서로울 서(瑞)자인데. 설명서에는 살 서(棲)로 되어 있다. 글자가 어쩌든 뭐 학이 젖을 물리는 것보다는 글자 바뀌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할 것인가? 그러려니 하고 나오는데 칠팔살 되어 보이는 어린 친구가 사진 찍은 나를 보고 궁금하여 다가왔다.
“뭐예요? 머하는 거예요?”
두 눈 말갛게 하며 물었다.
“혹시 말이다. 저 (석재공장에 서 있는 길쭉한 돌기둥을 가리키며) 바위처럼 길쭉한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 알아?”
“몰라요.”
나무가 두 그루 수호신처럼 서 있고 가운데 관도 없이 몸통에 옷자락 흔적만 새겨진 민불을 찾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저 사무실에 어른들 계셔?”
“네, 가서 물어보세요.”
그러고는 뛰어가 버렸다. 오늘 나의 목표물을 찾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붙잡고 물어 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 근방에서 자리를 하고 사는 분들이 제일 잘 알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아까 그 어린 친구는 벌써 나의 존재를 알렸는지 어른의 손을 잡고 거기 서 있었다. 민불을 물으니 길 건너편 2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있다며 알려 주었다. 큰길이 나면서 석불과 학서정의 사이를 완전하게 나누어버린 것이다. 30여 년 전에는 민머리 입불이 있고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정자가 있었는데. 입불은 민불에서 석불로 이름도 바뀌어 있다.
[화순대리석불입상]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3호(2004.02.13 지정) 관이 없고 민머리여서 지장보살로 보는 이도 있다는데 나에게는 그냥 정겨운 돌부처님이다.
돌부처님과 30년 만에 서로 안부를 묻고 또 사진 한 컷 찍고 합장하고 돌아 나온다. 이야기를 만들려면 참 많을 것이다. 그런데 구전되는 이야기라는 것이 참 허무맹랑한 것이 많다.
진각국사 혜심은 어머니가 배씨 인 것은 맞지만 아버지는 참외가 아닌 최씨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참외를 먹고 잉태하였다고 둔갑을 했을까?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머니 배씨가 처녀의 몸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기도를 하려고 정화수를 뜨러 갔다가 자치샘에 떠 있는 참외를 먹고 잉태하였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낳았으나 학서정에 버렸다가 생사가 궁금하여 찾아갔더니 학이 감싸고 있어서 기이하게 생각하고 다시 데려다 키웠는데 그 아이가 13살에 지눌에게 출가하여 송광사 2대 선사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한 꼭지이다.
한 꼭지는 잉태를 한 것은 같다. 버린 아이를 관원이 주워오게 되고 아이를 버린 배씨 처녀가 잡혀 왔다. 아이를 관원이 데려와서 버린 어미를 찾고 보니 배씨 처녀였다. 어인 연유로
아이를 낳게 되었는지 그 연유를 묻자 배씨 처녀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기도하다가 참외를 먹고 잉태되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 버렸다. 가서보니 학이 보살피고 있었다.
전설과 사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야기도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덧붙여지고 덜어지고 하나 줄거리는 살아 있다. 어이해서 그런 전설이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자치샘은 지금도 우물로 남아 있고 이야기는 스마트폰 시대에 자치샘을 검색하면 그렇게 나올 뿐이다.
물은 가능성의 우주적인 총계를 상징한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가능성의 원천이며 저장고라고 한다. 서양철학에서 물을 보는 견해도 그러했지만 동양철학 노자 『도덕경』 8장에도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고 했다.
화순에는 그 물의 원천인 십정원두가 있다. 열 개의 근원이 되는 샘이 있었다는 것이다. 남산을 중심으로 10개의 샘 중 하나가 자치샘이다. 사람들을 먹여 살렸던 샘은 불행하게도 개발에 밀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샘이 많고 흔적이 있다고 해도 그 물을 먹을 수는 없다.
대리석불을 보고 그냥 오기가 뭔가 아쉬움에 부처샘을 찾았다. 부처샘은 신기리 부영아파트 공원에 있다. 아마도 유일하게 지금도 물을 먹을 수(?)있는 물이 부처샘이지 않을까?
이곳을 지나던 스님 한 분이 지형을 살피다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찌르니 물이 솟았다 하여 부처님이 주신 물이라 하여 부처샘이라 이름 하였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근 광주에
멀치아 엘리아데 / 이동하 옮김 『성과 속』 종교의 본질, p115 물의 상징 구조
화순 남산 십정원두 위치도 (10정 가운데 유일하게 흐르는 '동네 샘' 최연종)
서도 물을 길러다 먹을 정도로 물맛이 좋았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비가 부슬거리며 내리는데 물이 꽐꽐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워서 물꼭지를 잠그려고 했지만 잠궈지지 않았다.
▲ 부처샘 공원 표지석 잘 정비된 부처샘 먹기에는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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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물이 흐르는 부처샘을 보고 옥거리 샘으로 향했다. 옥거리샘 역시 전설이 깃든 샘이다. 십여 년 전만해도 물이 맑았던 기억이 있는데 여기 역시 이름이 옥로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옥거리 샘 이야기」의 줄거리는 윤씨부인이 황씨와 살고 있었다.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자 그를 장사지내고 마지막으로 부처님 앞에 제를 올리고 자신도 죽을 결심으로 기도를 하던 중 선녀가 나타나 죄 많은 사람이 죄를 다 소멸시키지 못하고 자결함으로써 더 큰 죄를 범하려느냐는 꿈을 꾸었다. 꿈을 꾸고 죽으려던 생각을 접고 보살행을 한다. 감옥 근처네 살면서 목마른 이에게는 물을 주고 배고픈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며 사는데 나이가 들었다. 감옥 근처로 와서 물을 떠 주며 살았는데 그마저 힘겨워 못하는데 새벽 예불을 마치고 오다가 늙은 호랑이를 만난다. 자신이 키우던 닭 한 마리와 물을 떠다 주니 먹고 기운을 차려 떠났는데 다음날 개 한 마리와 닭 한 마리가 마당에 있고 발로 판 흔적이 있어서 파보니 물이 나왔다. ‘감옥 거리에 샘이 생겨나게 된 유래’를 이야기를 만들어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 샘이 옥거리샘이고 이 샘 근처에 감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설은 전설일 뿐 감옥도 없어지고 이름도 옥로천으로 바뀌었다. 옥거리건 옥로천이건 지금은 거미줄이 물로 가는 문인양 막고 있었다. 걷어낼까 하다가 거미 역시 나보다 여기 줄치고 산 세월이 얼마일 것인가? 그냥 두고 사진을 찍었다.
흘러가는 물도 떠주는 공이란다
어둔 곳에 불을 켜고 목 마른이 물을 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장 작은 은혜려니
가진 것 없다말고 자연 속에 있는 것을
내 눈에 띠는 것도 인연이라 여기어
아무나 연이 닿거든 나누며 살아보세.
- 가진 것 없다말고(양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