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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가을 밤거리에서-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전남방송   기사입력  2021/11/15 [09:09]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전남방송

큰 행사를 치른 뒤라 피곤하였던지, 오후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일본 먹방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를 한참 동안 봤습니다. 굵은 우동 면발과 맑은 국물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저녁이 되자 벌떡 일어나 우동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기대했던 만큼의 맛은 아니었지만 아쉬운 대로 마음의 허기는 달랠 수 있었습니다. 소화도 시킬 겸 오랜만에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증심사 아래 배고픈 다리에서 학동 전철역 사이 거리는 예전 모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새롭게 리모델링해서 깔끔한 건물들도 있지만, 낡은 티를 숨기지 않은 건물들이 대부분입니다. 인적이 드물어 휑한 구도심과 비교하면 환하게 불 밝힌 가게라든가 중간 중간 들어선 새로운 건물들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로 생기가 넘칩니다.

 

자연도 오랫동안 보고 살면 지겨운 법.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라고 도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사회생활을 했던 나로서는 80~90년대의 거리가 마음 한편에 고향처럼 남아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시골 마을의 전경이 추억이듯 말입니다. 3층 내외의 상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라든가,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 투박한 간판 같은 것들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아무런 걱정없이 밤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띄었습니다. 항상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데… 차를 세울 데가 없네. 아! 아쉽다 아쉬워’ 하면서 지나치던 바로 그 가게였습니다. 얼른 들어가 같이 사는 스님들 먹을 것 주문하고 또 그 자리에서 디저트 삼아 작은 컵 사이즈로 하나를 먹었습니다.

 

강원(講院)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이스크림을 제법 좋아했습니다. 선방 다닐 때도 자주 먹곤 했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멀어졌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역시 이 가게 아이스크림은 고르는 맛이 일품입니다만, 눈에 익은 게 거의 없습니다.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아! ‘체리 쥬빌레’는 지금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하지만 다른 것들은 처음인 듯 처음 아닌 듯 처음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초콜릿이 듬뿍 들어가서 묵직하고 끈적한 것들을 좋아했던 것 같은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은 상큼한 것들에 더 마음이 갑니다. 나이를 먹으면 입맛도 변하나 봅니다. 그래도 민트 계통이나 쿠키 같은 게 들어간 것은 여전히 땡기지 않네요.

 

한 손에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들고 아파트 옆으로 난 인도를 걸어 차를 세워 둔 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가슴 한구석이 흐뭇했습니다. 출가 전 마지막으로 살던 곳은 홍대 옆 극동방송 뒤쪽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눈알이 핑핑 돌 정도로 복잡해졌지만 그땐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극동방송 주변만 해도 주택가 분위기였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빵집을 지나다가 불쑥 들어가 빵을 사기도 하고, 유독 카레가 맛있어 보이면 그날은 카레로 저녁을 대신하던 기억이 아련한 추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절집에서 사는 게 그럭저럭 나쁘진 않습니다만, 퇴근이 있는 일상이 없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가끔 퇴근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네 거리를 어슬렁거리면서 거리의 풍경들을 일없이 휘휘 둘러보고 싶습니다. 물론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을 이어가는 이들에겐 행복에 겨운 푸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뼛속 깊이 도시 촌놈이었던 내게 밤거리 산책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마 꿈엔들 잊힐 리 없는 고향이 반드시 실개천이 흐르는 시골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마도 내가 바라는 소소한 일상은 이런 것들이었나 봅니다.

적당한 추억은 인생의 맛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스트가 빠지면 빵을 만들 수 없듯, 추억은 삶을 성숙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재료입니다. 가을이 깊었습니다. 밤거리를 걷기엔 이보다 더 좋은 때도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한다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좋은 인생은 반드시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합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이보다 슬픈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요? 추억이 없는 삶이야말로 ‘배드 라이프’(Bad Life)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한 템포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부디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만드시기 바랍니다.
 
출처: 광주일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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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15 [09:09]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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