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들이여 이제 그대들이 나설 차례다”
여성 1호 초헌, 600년 이래 처음이라니! 지난 추석 때 도산서원 제례에 여성이 초헌을 올려 화제였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전근대적이며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단 얘기 아닌가. 엄격한 격식을 차려야 했던 곳에서는 아직도 쉽게 그 틀을 벗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그동안 끊임없이 페미니즘 운동을 벌여온 선구자적 여성들의 노력이 육백 년의 세월을 거쳐 이제야 온전히 그 빛을 보게 된 것인가.
필자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우리 집에 또래의 친척 남자아이가 재를 넘어 찾아왔다. 처음 온 아이여서 촌수를 따지고 우리가 어디쯤 자리하고 있는가를 찾아보자고 족보를 펼쳤다. 그 남자아이는 이름이 나오는데 필자의 이름은 아무리 뒤적여도 없었다. 그 순간의 당혹함이라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얼굴 붉어졌다. 그 기억이 오래오래 마음속에 박혀 있었다.
필자는 학교에선 남녀 학생을 막론하고 우수한 학생이었고 온 집안에서 애지중지 사랑을 받던 터라 그 자리에도 당당히 필자의 이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으니 세상에 속절없이 속은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울면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께선 어린 딸에게 너무도 미안해하시며 너는 결혼하면 남편과 함께 올리어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아버진 “그게 참 잘못된 관습이라 생각한다.” 시며 다음 다시 족보를 바꿀 때는 꼭 너를 올리겠다고 약속하시었다.
그러신 아버지는 필자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집안 조상님들 시사를 모시는 날 필자를 산소로 데려가셨다. 산소 앞 제단에는 많은 제물이 정갈히 차려져 있고 그 앞에 두루마기를 입은 제관들이 길게도 늘어서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신 도포를 근엄하게 입으셨다. 그 중앙 앞으로 내 손을 잡고 가 세우시더니 제문을 내가 읽게 해주셨다. 한자로 된 제문이었는데 나는 당당하고도 초롱초롱 그 제문을 잘 읽었다.
안날 저녁 아버지는 제문에 대한 설명을 그래서 미리 내게 하셨던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는 족보에 필자의 이름을 올려주지 못한 것에 대한, 그날 필자의 울음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풀어주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딸을 보며 늘 그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때야 아버지의 딸에 대한 아린 마음을 알았다.
얼마 전 강경화 외교부 장관 남편의 외유 문제가 시끄러웠다. 그가 장관직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야당의 공세에 아내를 무시한 남자들의 문제, 곧 페미니즘 관점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강 장관이 여자라서 그런 경우를 겪는다고 동정론과 연민의 정을 보내기도 하는 걸 들었다. 청문회에서 고개 숙인 강 장관의 대답 “말린다고 들을 사람 아니어서” 란 말이 잘 증언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떠들어도 아직도 완고한 가부장적 그 관습은 알게 모르게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아내가 공직에 있다면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마땅히 헤아려야 했다. 세상의 남성들이여! 이제 남성들이 대답할 때다. 스스로 가슴 저변에 못난 생각이 추호라도 깔려있다면 과감히 버리고 진실로 평등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고.
* 문인선 약력
시인/시낭송가/문학평론가/경성대창작아카데미 교수
교육청연수원 강사. 전) 평화방송시 낭송담당
한국문인협회 중앙위원. 부산문협 연수이사. 한다사문학전회장.
연제문인협회 창립회장. 한중윤동주문학상 심사위원장
전국낭송대회 심사위원장. 2009전국예술제 시부문 대상.
실상문학작가작품상. 백호낭송 대상 외 다수.
시집으로 <애인이 생겼다> 외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