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낳아지요 하루아침에 세상 부러울 거 없는 부자가 됩디다. 주말이면 손자 오기를 고대하는 할아버지댁 간다고 오산서 비둘기호 타고 서부역 가는 기차에서 "나는 아들 낳았어요 태양을 가졌어요"라고 자랑합니다 .
귀저기 한가방 가득 분유와 우유통 원기소 등 챙기느라 부르튼 젖 두통을 애기가 번갈아 딸꾹
딸꾹 빠는 소리에 스르르 잠들었지요. 앞섶은 다 풀어 헤쳐져 있고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차창밖 나무들도 푸른 젖 먹고 막 엉켜서 뒤로 뒤로 달려갑디다.
젖이 부족해 비싸다는 돼지 다리도 두어 개 고아 먹었지만 돈이 원숩디다. 집에서 자른 영구 머리에 제 누나 빨강 바지 입고 뒤뚱뒤뚱 걸어오면 더 없이 예뻐서 덜렁 안아 뽀뽀 쪽 하고 들쳐 업고는 검으티티환 정부미 씻어 연탄불에 밥을 안칩니다. 잡곡밥인 듯 아닌듯 큼큼한 냄새도 구수한 맛으로 바뀝니다. 금쪽같은 자식이라고 여러 해 젖 물리고 나니 지금은 말라빠진 짝짝이 젖 휑한 가을 들판 덜렁덜렁 바람만 쉬어갑니다. 내일은 딸 사위 손녀들 아들과 함께 새해 해맞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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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화
네 앞에서 망설인다
지나간 너의 영토에는
색 바랜 산수화도
눈물로 얼룩진 세월도 있었다
이미 던져버린 패를 뒤집어 보듯
그냥 찢어버리고 싶었던 날들
다시 펼쳐 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한 페이지는
어둠의 커튼을
포근히 덮어주기도 하지만
오늘
흰 머리카락 염색을 하다
문득 펼쳐놓은 59페이지
더 이상 넘기고 싶지 않은
페이지앞에서 눈을 꾹 감아본다
솔방울 같은 그대
신재화
솔방울은 비가 오면
입을 다문다
입 속에 든 새끼들을 위해
그러다가
볕이 나면 입을 열고
씨앗을 말린다
고슬고슬 잘 말려진
씨앗들을
멀리 날려보낸다
가을 깊어지고
추운 밤이 달려오면후미진 골골목 들어서는
뒤모습처럼 시리다
한 세월
푸르게만 버티던
그대
외로움의 무게
신재화
동네 마을회관 앞을 지나다가
외로운 노인과 눈 마주쳐 내마음 들벼버렸다
멋쩍어서 살짝 웃으며 지나갔다
사뿐사뿐 걷는 옆모습과 뒷모습의 무게가
두 사람 발걸음으로 가볍게 걷고 있었다
외오움은 멀리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눈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놓아버릴 뿐
함께 머무는 시간보다
눈에서 떠나 보내는 시간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팽팽한 평행선을 잡고 선 나
적절한 타이밍 몰라 외줄에 올라서 바둥거리고 있다
빛바랜 벽, 펄럭이는 한 장 달력도
혼자의 무게에 눌려 외로움에 떤다
나는 이제서야 그 수고스러운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지난 긴 시간 보다
진실된 하루를 가볍게 펼치며 살아 가려 한다
외로운 노인은 먼저 찾아와 인사한다
지나는 길목에 서고
이제는 앉았던 의자를 내어 준다
나 이제서야 외로움 무게를 안아 본다
눈송이가 호빵처럼 내리는 저녁
신재화
큰 오빠 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대문밖에는 송이 눈이 쌓이고
눈덩이는 하루종일은 펄펄
옥수동 판자촌을 안아주고 있었다
오줌싸 칭얼대는 큰조카 등허리 걸치고
허리가 저려오는 아픔도 잊은채
눈 뭉치 굴려 눈사람 만든다
널판지 대문 앞에 문지기로 세워놓고
막내둥이 올려보내 공부시키는 죄목으로
시골 남의 땅 빌려 농사짓느라 할머니 된 엄마
얼굴 붙이고
거름지게에 눌려 한쪽 어깨 꺽인 아버지
등 붙여 놓은다
한강 건너 압구정도 네온 불빛으로
판자촌 불 밝혀 숙제 하고 나면
등에 잠든 아기 방바닥으로 내려가고
공장일 간 큰언니 작은언니 차례로 집으로 온다
하얀 밤은 통금향해 달려갈 때
산타 모습으로 등장하는 큰오빠 양손
하얂게 큰 눈덩이들 이고 들고 왔다
배고픔과 추위로 차라리 감았던 눈들 일으켜
큰 호빵 나눠 먹고 잠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