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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삶을 치유하다
박지웅 시인篇
 
오현주 기자   기사입력  2020/01/05 [09:28]

  

먼저 칼럼이 나오기까지 2년을 기다려준 박지웅 시인에게 죄송함을 전한다. 그의 시세계를 객관화된 진중한 자세와 최대한 전문성을 가미하여 소개하고자, 고민에 갇힌 동안 적잖은 시간이 열병으로 지나갔다.

 

버릴 줄 아는 즐거움을 위해 잘 쓰려고만 애쓰던 욕심을 내려놓기로 한다. 그러나 결코 헛되지 않은 계절을 제공해준 박지웅 시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시인의 슬픔을 맑고 투명하게 봉합했을 나비의 날개는 제 심장을 수없이 두드리고 두드려 만들어냈을 것이다.

 

박지웅 시인의 시세계에서 아픔이란 달콤하리만치 명랑하기에 허무와 부조리를 신비롭고 황홀하게 뒤바꾸고 있다. 그 신랄한 역설은 실존하는 고통과 외로움을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며 기쁨의 척도를 재생산해내는 일인 것 같다그로인해 독자는 나비의 탈피를 지켜보는 듯, 경이로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로테스크 한 언어 표출은 현상 너머를 응시하며 상상력을 확장 시키는 장치로써 매력적 구도를 이루는 듯 보인다. 나비를 매개체로 그와 동시화同視化 한 나의 슬픔. 그것이 내 삶에 있어 얼마나 유용有用 하였는가를 직시하게 된 뒤로 감사한 기쁨이 줄줄이 찾아왔다.

 

사과를 쥐어짜면 끝내 쓴맛을 남긴다. 이처럼 그의 작품엔 슬픔이 배후에 자욱하게 깔려 있으나 억지로 비틀어 미화하지 않는다. 다만 득달같이 달려와 환심을 사려는 가벼운 기쁨과 맞바꾸지 않을 뿐이다. 오로지 그의 기쁨은 깊은 구덩이를 판다.

 

박지웅 시인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고백서와 작품을 싣는다.

시를 읽는 빛나는 손가락에게 다음을 기약하며 안녕하길 바란다.

 

ㅡ 세상에는 다섯 계절이 있다.

,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비.

빗줄기들의 획순을 따라가면 거기 당신이 있다.

당신은 자주 내 의 초고였다.

누군가의 울음이 나의 서식지였다.

그 한 방울에는 모든 까마득한 것이 깃들어 있다.

이 모두 그곳에서의 일이다.

     

* 서큐버스

 

                                       박지웅

 

신도림역에서 애인의 침대로 갈아탈 수 있다

지하철에서 침대로 환승하는 이 구조에 놀랄 일은 없다

참 많이들 드나드는 곳이니 뭐 대수겠는가

누구든지 올라타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애인은 종이처럼 쉽게 불붙는 입술을 가졌다

아래쪽은 생각마저 들어서면 뜨거워지는 곳으로

예민하지만 보통은 죽은 쥐처럼 붙어 고요하다

바로 애인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곳을 문지르면 애인은 찍찍거린다

 

희한한 일도 아니다 가랑이에 대고 피리를 불면

애인의 애인들이 나온다, 찍찍거리며

인물은 애써 무덤덤한 말투로 넉살을 부린다

역시 이곳에는 쥐가 많군

사랑하는 서큐버스, 당신이 죽으면 지하철에 앉혀둘게

 

인물은 쥐떼를 다른 꿈에 버릴 생각이다

물오른 육체에서 쏟아져 나온 시끄러운 쥐들

더럽게 찍찍거리는 애인의 정부情夫들을 이끌고 나서는

이 새벽은 세상이 만든 조잡한 불량품이다

문 앞에 버린 거울, 그 안에 처박아 함께 버린 하늘

땅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더러운 구름이 붙어있다

구름 위에 벽돌을 얹고 지근지근 밟는다

지하에 떠 있는 하늘은 무용지물이다

저 쥐새끼들에게도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볕 들 날은 오지 않을 테니

 

악몽에서 악몽으로 환승하는 지하도

꼬리에서 꼬리를 문 긴 난동의 악보가 꿈길을 덮고 있다

여기에 이것들을 풀어놓은 자는 그대인가 나인가

 

, 모든 밤의 여행지는 몽마夢魔의 침실로 통하고

신도림은 악몽의 환승역

수군대고 찍찍거리는 승객은 모두 아는 얼굴들

가깝거나 낯익은 얼굴이 악몽의 온상이니

보라, 악몽은 실체를 경유한다

 

인물이 신도림에서 피리를 분다

얼굴들이 몰려온다

그림자들이 찍찍거리며 뒤에 따라붙는다

인물은 길어지고 늘어지고 본인에게서 멀어진다

얼굴이 얼굴을 갈아타고 퍼져나간다

인물은 번식하고 애인은 번성한다

 

▲     ©전남방송

      

* 박지웅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2004<시와 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11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19회 천상병문학상 수상

2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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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1/05 [09:28]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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