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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루의 문화포커스] 숨겨진 보물, 화순 이양면의 쌍봉사
 
이미루 기자   기사입력  2019/08/14 [11:20]

 

▲  쌍봉사 전경   © 이미루 기자

 

공원이나 광장의 문지방 같은 곳에서

가늘고 가는 분수噴水질이나 치다가 돌아가야 할

그간의 쓸쓸함에 대하여는 발설하지 않으리.

- 정윤천의 시 ‘고래’ 일부

  

도로에서 벗어나 한적한 들길을 한참 동안 돌아가 보면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아도 길가에 핀 백일홍 꽃가지들 너머에 아담한 절집 한 채가 보인다.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 자리한 쌍봉사이다. 붉은 석양 길 위에 늘어선 쌍봉낙타들의 대열을 떠올려 주는 듯한 사찰의 이름이 이채롭게 여겨지는 순간이다.

 

철감선사와 함께, 寺名의 비밀을 찾아서

어디에서도 쌍봉은 보이지 않는다. 뒷산의 이름은 쌍봉이 아니라 계당산이었고 능선조차 쌍봉낙타의 등을 닮아 있지 않았다. 조금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해주는 쌍봉사 寺名의 유래는 무엇일까 자못 궁금해졌다.

쌍봉사는 정확한 창건시기가 불분명한 절이라고 한다. 세간에는 철감선사澈鑒禪師 가 세운 절이라는 설이 있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惠哲이 839년(통일 신라)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하안거를 지낸 곳이라는 견해가 있어 839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847년 唐유학에서 도를 깨치고 귀국한 철감선사 (798~868)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이 절의 사세가 크게 일어났으며 쌍봉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속명이 박도윤인 철감선사는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18세에 김제 귀신사에서 출가했다. 825년 당나라로 유학하여 귀국한 후 경문왕의 권유로 쌍봉사에 들어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철감은 법력과 덕망이 높아 왕이 스승으로 삼기도 했는데, 868년(신라 경문왕 8) 71세 되던 해에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철감은 그의 입적 후 왕이 내린 시호이다. 왕은 또한 그의 공덕을 기려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쯤에서 우리는 쌍봉사라는 이름의 비밀을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속명은 도윤, 시호는 철감인 그의 호가 바로 쌍봉(雙峰)이었다. 쌍봉사는 이를 따와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 삼층목탑형태의 대웅전,  대웅전 오른쪽 T 자형 전각은 호상전이며 왼쪽은 지장전이다.   © 이미루 기자

 

적막 속에 피어난 수련 같은 얼굴, 대웅전

천왕문을 지나자 바로 정면에 대웅전이 보인다. 일반 절의 대웅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모습이다. 균형 잡힌 목탑의 형태를 띄운 건축물 안에 대웅전이 들어 앉아 있다. 단아한 동양의 미녀와도 같은 품이 이곳 대웅전의 느낌이라면 이 역시 파격적인 상념일까.

뒷산은 그 모양이 배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여 비보풍수(넘치는 기는 억누르고 부족한 기는 보완하여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모색하는 풍수지리사상)의 경우로 배의 순항을 위해 대웅전을 돛대모양(3층 목탑)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정면 1칸 측면 1칸 총 높이 12m인 3층의 정방형전각의 이 작은 쌍봉사 대웅전은 통일신라시대양식의 탑파형 건물로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2개뿐인 목조탑파형 건물이다. 목탑의 양식을 취하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2, 3층으로 올라갈수록 기둥의 높이를 급격하게 낮추는 체감법을 사용해서라고 한다. 체감법은 주로 석탑양식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으로 3층의 무게로 인해 추녀머리가 숙여지지 않도록 건물 중앙에 굵은 찰주를 세웠으며, 커다란 주초 위에 굵은 기둥을 세웠다.

1936년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보존해 오던 중 1984년 4월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는 불운을 맞게 되었고 문화재지정이 해제되었다. 1985년 8월 수집된 자료들을 토대로 복원공사를 시작해 1986년 12월 30일 지금의 형태로 복원 되었다. 아직 문화재로는 재 지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복원과정에서 3층의 팔작지붕이나 상륜부의 용마루와 같은 원래의 모습이 유실되었다. 고색을 따라갈 수 없으나 단청을 곱게 입은 현재의 대웅전은 경내의 수목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려주며 있었다.

 

▲  두개의 봉우리처럼 서있는  보물들 © 이미루 기자

 

쌍봉으로 우뚝 서있는 뒤란의 보물

쌍봉사는 국보(國寶)를 간직한 전남 지역의 몇 안 되는 사찰이며 화순 유일의 국보 보유사찰로 알려져 있다.

경내를 벗어나 대나무 숲길을 끼고 사찰 뒤의 계당산으로 가는 작은 길을 나선다. 입구에 작은 팻말 하나가 서있다. ‘부도탑 가는 길 100미터’. 바로 국보로 가는 위치를 알려주는 표식이다. 불상이나 탱화가 국보일 거라는 애초의 예상은 빗나가 버렸다.

대나무 숲과 야생차밭 사이로 이어진 길을 따라 얼마간 오르니 산중턱에 숨겨진 듯 숨겨져 있지 않은 보물 두개가 우뚝 서있다.

중요문화재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和順雙峯寺澈鑒禪師塔:국보 제57호)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和順雙峯寺澈鑒禪師塔碑:보물 제170호)가 그것들이다. 흡사 쌍봉처럼 서있는 두 개의 보물들은 마치 폐사지의 유적처럼 잡풀과 뒤엉키고 이끼를 입고 있어서 보전에 대한 염려를 해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자 세월의 옷을 온몸에 입은 이 석조예술의 극치미는 그 위용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주었다.

 

▲   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 이미루 기자

 

학계와 교계는 물론이고 문화재적인 측면에서도, ‘철감선사탑’은 국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석조부도로 평가 받고 있다. 신라 석조부도의 일반형인 8각원당형이며 높이 230cm의 화강암이다. 탑신과 옥개석은 있으나 상륜부(머리장식)는 사라졌다고 한다. 8각의 지대석은 현재 시멘트로 보수한 상태이다. 옥개석의 기왓골과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와 끝에는 암막새와 수막새의 막새기와를 표현했는데, 수막새에 여덟 잎의 연꽃무늬를 새겨 넣어 실재 기와집의 느낌을 주었다. 특히 지붕돌 밑면의 비천상은 마치 천상의 솜씨인 듯 경이로움을 주고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에는 사자·가릉빈가·사천왕·비천 등이 조각되어 있고 하대석에는 구름무늬가 놓여 있다. 그 구름들 사이로는 쌍룡이 서로 마주보는 형상이 조각되어있다. 철감선사의 높은 도력과 덕망이 어쩌면 그 부도탑에 서려 있는 것도 같았다.

 

▲   보물 제170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 이미루 기자

 

철감선사탑 옆의 ‘철감선사탑비’는, 현재 비신碑身은 유실되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머리돌만 남아있다. 용의 얼굴을 한 거북이 여의주를 물고 머리를 앞으로 곧추세우고는 당장에 달려 나갈 것 같은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돌 중앙에는 「雙峯山故澈鑒禪師碑銘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이라는 글자가 두 줄로 새겨져 있으며, 여백에는 구름과 반룡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맨 윗면에는 화염에 싸인 연꽃무늬 세 개를 새겼다. 이처럼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으며 한편으론 귀엽기까지 한 거북형상의 비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  보물을 찾아 올라가는 길가를 따라 자생하고 있는 야생녹차밭  © 이미루 기자

 

茶聖이 머물다 간 자리, 야생차밭

부도탑으로 가는 초입에는 또 하나의 팻말이 있다. 1807년 초의선사가 쌍봉사에서 공부하며 처음으로 쓴 시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가 적혀 있다. 새벽녘 철감선사의 부도를 찾으며 자신을 돌아보며 쓴 시라고 한다.

초의는 다성(茶聖)으로 불리며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기 전 이곳에 와서 잠시 수도정진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해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알리고 선과 결합해 다도의 정신을 완성한 그는 어쩌면 이곳에서부터 차를 알아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도탑 오르는 길에는 야생차나무가 즐비하게 늘어 서있었다.

쌍봉사에선 매년 호성전(護聖殿)에 나란히 모셔진 철감선사와 조주스님께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올리는 다례제를 열고 있다. 철감선사는 당나라 안휘성 유학 중 조주스님과 함께 남전선사의 제자였다고 한다. 조주스님은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끽다거喫茶去)”라는 화두를 던진 스님으로도 유명하다. 당시에 차는 매우 귀해서 부처님께 올리는 다례 행위는 중요한 의식이었다고 한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성분이 있어 스님들이 수양할 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 문화의 영향을 받은 철감선사의 다맥은 쌍봉사로 전해졌는데, 이는 초의선사에게로도 이어졌을 것이므로, 쌍봉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역사’에서 중요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   절뒤의 계당산 오르는 길, 대나무 숲이 높고 울창하다    © 이미루 기자

 

공단처럼 빛났었으나 쓸쓸하지 않으리

쌍봉사의 사세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특히 고려 후기 최씨무인집권기에 그 위상이 크게 높았다. 이는 출가한 최우의 아들 최만전이 쌍봉사에서 기거했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그 아래에 여러 사찰을 두게 되었으며, 많은 승려들이 거처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이르러 사세가 주춤하였지만 세종 때 중건의 기록이 있으며, 세조와 인연이 깊었던 관계로 1475년 세조는 쌍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어서御書와 5결의 전지田地, 조세 면제, 승려 잡역 일체를 면제하여 사찰로서 확고한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소실, 폐허가 되었지만 인조 6년, 현종 8년, 경종 4년에 차례로 중건하여 400여 칸에 이르는 큰 사세를 펼쳤다고도 한다. 고려 뿐아니라 조선에서도 쌍봉사에 대한 지원은 계속 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쌍봉사는 죽수서원竹樹書院의 속사屬寺가 되면서부터 유림의 요구와 핍박이 이어졌다. 관청의 조세징수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쌍봉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쌍봉사에 대한 관청의 징수가 66항목에 이르러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쌍봉사는 대흥사의 말사末寺로 전락하며 본사本寺의 사격寺格을 잃게 되었다. 1935년에는 오백 나한상이 백양사로 옮겨지면서 더욱 축소되었다. 설상가상 6·25 전쟁으로 사찰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대웅전과 극락전 명부전 등 몇몇 전각만 남아 지금에 이르렀다. 쌍봉사는 현재 송광사(松廣寺)의 말사로 등록되어 있다.

 

▲  대웅전 안의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의 삼존불,  미소와 눈웃음이 환하다.    © 이미루 기자

 

祕話, 화마에서 구한 목숨들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간혹 일어난다. 쌍봉사에도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 전해 내려온다. 1984년 대웅전에 화재가 났을 때의 이야기다. 불이 난 대웅전 안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흘러나와 한 농부가 뛰어 들어가 이를 구하게 되었는데, 나와서 보니 사람이 아니라 불상이었다 라는 전설이다. 대웅전은 전소되었지만 농부의 구조로 인해 불상은 타지 않았고 그을리기만 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과 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를 화마에서 구해낸 것인데, 놀라운 것은 구조된 불상들은 사람이 혼자서 들 수 없는 무게였다는 것이다.

보통 대웅전에는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을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쌍봉사 대웅전은 직계제자인 가섭과 아난존자를 모셨다고 한다. 목숨을 구한 쌍봉사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은 전남 유형문화재 251호로 조선 숙종 20년(1694)에 제작된 조선후기 대표 불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대웅전의 불상들을 살펴보면 온몸으로 활짝 웃고 있는 아난존자와 가섭의 형상이 보인다. 천진하고 밝게 웃는 모습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세속의 번뇌가 씻겨나가는 듯하다. 또한 대웅전 화재로 사라질 뻔한 대웅전 바로 뒤의 극락전은 그 앞에 서 있던 수백 년 된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아 이를 지켜냈다고 한다. 하지만 2그루의 단풍나무는 줄기의 절반이 열기 때문에 고사되었다.

 

▲ 고목사이로 대웅전이 보이고  대웅전 바로  뒤 두구르의 단풍나무 사이로 극락전이 보인다.     © 이미루 기자

 

에필로그

쌍봉사는 오늘 날 고즈넉하고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의미있는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국보 외에 보물 제1009호인 능성 쌍봉사 감역 교지(綾城雙峯寺減役敎旨), 보물 제1726호인 화순 쌍봉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1호인 대웅전 목조 삼존 불상, 지방 유형 문화재 제252호인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문화재 자료 제66호 극락전과 쌍봉사 사적비, 부도 등이 그것들이다. 아쉽게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 되어버린 극락전 안에 모셔졌던 삼존불 중 두 개의 협시불은 1989년에 도난당했다.

 

그러나 영욕의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도 푸르고 너른 마당이 존재하며 적당히 배열된 전각이 주는 여백은 편안함과 차분함으로 다가온다.

꿋꿋이 자기 길을 가는 구도자처럼 쌍봉사는 여전히 수도승의 여여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청량한 기운이 대나무 숲길 위 댓잎 쓸리는 소리를 탐방객에게로 전한다. 인용시의 한 구절에서처럼 쌍봉사인들 자신의 쓸쓸함을 쉽사리 발설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  마당 뒤로 요사채가 보인다.  쓸쓸함을 발설하지 않으리...    © 이미루 기자

 

▲     ©이미루 기자

  

  *역사내용의 일부는 다음 백과사전을 참조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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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8/14 [11:20]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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