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乙이다
김장호
항상 부탁하며 살아가는
나는 乙이다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라
다른 사람과 잘 사귀지 못하지만 그나마
조금씩 염치없어서 乙로 살아가지
당신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성채의 성주
당신 앞에선 내 그림자조차 작아진다네
좀체 당신 속을 알 수 없어
당신 눈치를 보느라 하루해가 모자라네
한번쯤은 남다르게 살고 싶었건만
그렇다네, 세상살이
을의 삶도 필요하다고 마음 고쳐먹었네
버리면 길이 보일까
어제의 날카로운 적의를 내려놓았고
이젠 새우등이 제법 몸에 배었네
그런 나를 선택해줄 땐 고마워 눈물이 난다네
어둠의 갈피에 눈물자국 숨기고 돌아오지만, 가끔
아내의 손때 묻은 잔소리도 잠자코 들어준다네
그래도 한밤에 자리끼를 찾다가
내 영혼의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본다네
시인 김장호
시인 칼럼니스트 시집 『나는 乙이다』, 『소금이 온다』, 산문집 『희망 한 다발 주세요』 등이 있다.
詩說 강대선
『시와 사람』으로 등단. 『구름의 공터에 별들이 산다』외 시집 3권. 모던포엠 문학상, 국제펜광주 올해의 작품상, 광주시인협회 올해의 작품상, 여수해양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현 광주여상고 교사.
‘나는 乙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乙’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乙은 부탁을 하는 사람이고 갑 앞에서는 작아지는 사람이다. 이런 乙이 지니고 있는 것은 ‘눈물 자국’이다. 그래도 위안은 있다. 가족의 품에 돌아오면 ‘아내의 손때 묻은 잔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한밤에 일어나 ‘영혼의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甲과 乙의 사회가 되었을까. 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믿음이 깊지는 않지만 이 땅 낮은 자를 위하여 예수가 오셨다는 말을 믿는다. 乙을 위한 신의 하강이랄까. 그렇게 보면 예수는 혁명가 중에 혁명가였을 것이다. 갑이 아닌 乙을 위한 사회를 열고자 했으니.
甲의 자리에 오를 일이 없을 테니 어쩌면 나는 은총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영혼의 옆구리에서 乙들이 눈물이 만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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