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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지나간 자리_저녁 아홉 시
 
강대선   기사입력  2018/09/04 [10:28]

 

저녁 아홉 시

 

고경자

 

 

저녁 9시가 되면 이혼을 한다

결혼보다 쉬운 이혼,

매일 되풀이되는 이벤트다

 

아침에 약혼하고

오후 열두 시가 되면 결혼을 한다

하객들은 축하하기 위해 왔다가

우아한 한 끼를 해결하고 간다

 

열두 시가 저녁 아홉 시 사이

하나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그동안

이상한 나라 엘리스는 서둘러 집에 간다

 

식탁의 의자가 한 개 없어지고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은 지워졌다

 

저녁 일곱 시가 되자

아침에 예약된 이혼이 배달된다

꽃다발과 삼단 케이크에

 

축 이혼이라는 문구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혼 반지를 끼고

아홉 시를 기다린다

 

아홉 시,

재가 되어버린 시간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시인 고경자: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2011년 계간 시와 사람으로 등단 2015년 시집 하이에나의 식사법. 2018년 시산맥 감성기획 시선 고독한 뒷걸음출간.

 

 

 

 

詩說 강대선

▲     ©강대선

 

 

『시와 사람으로 등단. 구름의 공터에 별들이 산다외 시집 3. 모던포엠 문학상, 국제펜광주 올해의 작품상, 광주시인협회 올해의 작품상, 여수해양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수상. 현 광주여상고 교사.

 

 

삼교대로 일하는 간호사와 같은 직업을 가진 노동자는 하루 총 근무 시간이 9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12시부터 일하면 9시에 하루에 일이 끝난다. 일 속에서 화자는 시간이 뒤죽박죽 되는 경험을 한다. “하나의 문이 닫히고 열리는 그동안이 지나 집에 돌아오면 식탁의 의자가 한 개 없어지고/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은 지워졌다집과 일터의 부조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점이다. 시간의 혼돈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엘리스의 모험이 시작되는 지점은 회중시계를 든 토끼가 늦었다고 뛰어가는 것을 엘리스가 발견한 순간이다.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일상은 화자는 결혼과 이혼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이혼과 결혼은 따로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니다. 집과 직장이 서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듯이 이러한 반복의 개념은 시에서 유용하게 작용한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뒤죽박죽 된 시간 속에서 축 이혼이라는 문구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이혼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혼 반지를 끼고/ 아홉 시를 기다리는 직장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이혼을 하는 아홉 시 재가 되어버린 시간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비로소 자유의 시간이 온 것이다. 직장인에게 퇴근만큼 더 기쁜 시간이 어디 있을까.

 

왜곡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두 엘리스가 아닐까. 22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엘리스들이 방송에 오르내린다. 몸이 작아진다는 엘리스의 버섯이라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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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04 [10:28]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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