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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천년의 이야기 10>
풀 숲에 숨던 꺼병이
 
양인숙 아동문학박사   기사입력  2017/11/22 [14:57]

 

 

                                                                                       양인숙(아동문학박사)

 

지난 초여름, 도곡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는데 부스럭! 소리가 났다. 뱀인가하고 멈칫, 주변을 둘러봐도 풀잎도 흔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발을 옮기려는 찰나, “난 봤지요?” 뒤에 오던 동생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발아래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상에! 풀포기 사이에 꺼병이가 꼼짝도 않고 겁먹은 두 눈만 굴리고 있었다. 엄마가 가르쳤을까? 위험해지거든 그렇게 꼼짝 말고 있으라고? 어떻게 가르쳤을까? 짐승들도 다 나름의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을 시킨다는 다큐를 본적이 있다. 참 신기했었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마주친 꺼병이의 민첩한 행동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     © 전남방송

 

화순에는 능주향교 동복향교 화순향교가 있다. 향교는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었다. 숭유억불정책을 펼치기 위해 각 현에 향교를 설치하라는 명이 내린다. 유교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까지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조선을 세우면서 다른 이념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군주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받아들인 사상이 공자사상이다.  

▲     © 전남방송

                                                                               공자성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이 다섯 글자를 잘 새기고 따른다면 잘 못 될 일이 없다. 그러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가지의 덕목을 다 지키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 현에 향교를 세우게 되었고 지금은 문화재로 남아 있게 되었다.

  

1. 능주향교

1392년 능주향교가 설립되었다. 
‘능주 향교는 조선 시대 능주 고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고을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설립한 지방 교육 기관’이다.
창건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불에 타기도 했고, 타버렸다고 교육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니 다시 세우며 지금까지 향교는 유지 되고 있다.


능주 향교가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것은 1632년(인조 10)이다. 인조의 어머니인 인현왕후 구씨(具氏)의 본관이 능성인데 능성현에서 능주목으로 승격하면서 능주 향교의 규모가 소설위에서 중설위1)로 승격하였다. 

 

이와 함께 선현의 배향 규모도 확대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소설위에는 없는 공자의 수제자 10철의 위패를 만들어 봉안한 것도 목으로 승격한 것에 따른 것으로 중설위로 격상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능주향교는 1985년 2월 25일에 전라남도 지방 유형 문화재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이 있고 동재 서재가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10월에 찾아 왔으면 노란은행잎을 보았을 것인데 더구나 검색에 의하면 능주 향교는 다른 향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데 늦게 찾아 온 것이 못내 아쉽다. 혼자 저물어가는 계절, 저물어 가는 시간에 찾아와서일까? 작업을 하던 분들도 모자 벗어 두고 어딜 가셨는지 안전모 세 개가 명륜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다. 듬직하게 세월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에 까치집이 고즈넉하다. 

 

1)향교의 규모를 나타내는데 * 중설위는 府· 牧· 都護府 등 비교적 큰 읍에 설치하였다. * 소설위는 郡· 縣 등 작은 읍에 설치하였다. (난석재 카페에서 퍼 옴)
문 안에 건물이 명륜당으로 보인다.

 

▲     ©전남방송

     능주향교의 세월을 가장 많이 품었을 자웅의 은행나무 왼쪽 암나무 오른쪽 수나무

▲     © 전남방송

                     문 안에 건물이 명륜당으로 보인다.

▲     ©전남방송

 능주향교로 들어가는 다리 건너면 주차장이 있고 향교로 오르는 초입에 당간지주를 볼 수 있다. 

 

  

2. 화순향교

 

화순향교는 대성전이 좀 특이했다. 다른 곳에 비해 처마가 넓었다. 대제를 모실 때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했을까? 부연은 짧은 반면 본 처마의 넓이가 상당히 넓었으며 대들보에 단청이 매우 아름다웠다. 


화순향교는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늦게 창건되었다. 1434년(세종 16)에 창건되었는데 마침 향교에 계시던 사무국장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이 개국을 하고 각 고을에 향교를 설립하라는 명이 내려왔지만 향교를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인구수도 많지 않았지만 재정적인 어려움도 컸단다. 그래서 세종 때 와서야 창건 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는 보존되어 있는 건물은 5칸의 대성전과 기숙사로 쓰였던 동재(東齋) 서재(西齋) 여름철이면 강학의 장소로 쓰였던 만화루(萬化樓)가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敎官)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고 한다.


화순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있고, 만화루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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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에서 바람만 글을 읽고 있었다.

 


3.동복향교


화순의 또 하나의 향교는 동복향교이다. 조선시대 화순에는 능주목과 화순현, 동복현이 있었다. 그래서 현존하는 향교가 세 군데가 된 것이다. 지금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 곳 중 가장 늦게, 1445년(세종 27)에 창건되었다.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현 위치에 창건하였다.


1543년(중종 38)에 중수하고 1564년(명종 19)에 교리(校里)로 이전하였으며, 1655년(효종 6)에 관아(官衙)의 화재로 객사에 봉안되었던 전패(殿牌)가 소실되자 국가에서는 책임을 물어 동복현을 폐현시키고 화순에 편입시켰다. 이에 따라 동복향교도 성현의 위패를 매안(埋安)하고 폐교되었다.


그 뒤 1664년(현종 5) 동복현이 복현 되어 향교도 복교되었다. 1714년(숙종 40)에 향교의 위치를 현의 남쪽 독상리(獨上里)로 이전하였다가 1756년(영조 32)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03년과 1935년에 중수하였으며, 6·25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1959년 정부의 보조와 유림의 노력으로 대성전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 구조는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전라남도에서는 유일하게 대성전만 갖추고 있는 향교로서, 1986년에 삼문(三門)이 건립되었다.’ (인터넷 자료 정리)

 

동복향교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비탈길을 돌고 돌아 산을 하나 다 올라가서야 향교를 만날 수 있었다. 향교로 오르기 전 마을 입구에는 지나간 시간을 말해주듯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었다.

 

▲     © 전남방송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는 독상리 마을 입구

▲     © 전남방송

                                                                                     동복향교 대성전

마침 동복향교에서는 향교서원을 활용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성전까지 활짝 열어두고 있어 공자님의 성상을 만날 수 있었다.
올라가서 묵념을 하고 내려왔다.


배운다는 것, 왜 배워야 하는가? 교육이 왜 필요한가? 살아가기 위해서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말을 우리는 한다.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말이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일을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는 말을 나는 ‘성취할 수 있다’라고 바꾸고 싶다.


남을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쟁논리보다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정신을 새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도 알고 나도 알아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이, 무척(無尺)의 사이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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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22 [14:57]  최종편집: ⓒ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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