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들의 시선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차노휘 소설가의 섬으로 떠나는 완행열차8>
 
소설가 차노휘   기사입력  2017/09/26 [15:35]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S동물병원 원장이 포메라니안(Pomeranian) 보호자를 불렀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위에 목 아래 혈관이 잡히지 않아 양쪽 발목에 피를 빼고 밴드를 한 채 수액을 맞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원장은 20만원이 넘는 검사를 하고 난 뒤, 자궁에 고름이 있거나 암일 거라며 엑스레이를 찍은 모니터 까만 부분을 여자에게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암인지 고름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추가 검사를 한 뒤 곧바로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며 결정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확률은 반반이라고 덧붙였다.
 
여자는 포미(포메라니안 이름)의 배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포미의 의식은 없었다. 독소가 몸 전체로 퍼졌을 거라고 했다. 테이블에서 일어날 수 없을 확률이 많다고 원장은 또 강조했다.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는 뜻으로 여자는 돌려 들었다. 이렇게 죽는다면…. 포미가 매일 달리고 싶어 하던 산책코스도 보여주어야 하고 그동안 고마웠고 많이 사랑했다는 말도 해야 하는데, 체온이 남아 있을 때 따뜻하게 안고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
 
원장은 여자가 망설이고 있자, 자궁만 드러내면 3일 안에 팔팔하게 달릴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포미는 고령이었다. 말은 못해도 차가운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집에서 임종을 원했을 수도 있었다. 여자는 그냥 품에 안고 병원을 나서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혹시나 돈 계산으로 녀석의 목숨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죄책감으로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추가 검사 뒤 수술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때였다. 포미가 눈을 치켜뜨며 여자를 올려다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어 속엣것을 토해낸 것이. 그리고는 축 늘어졌다. 원장과 보조 간호사는 혀를 깨물까 싶어 입을 벌리는 기구를 장착하고는 응급처치로 들어갔다. 여자는 손가락을 포미 코에 댔다. 호흡이 점점 약해지더니 마침내 끊겼다.
 
“수술 받기 싫어서 먼저 가버렸나 봐요.” 원장이 말했다. 그럴 것이다. 십 분 뒤에 갔다면, 확률이 반반이라는 말을 들어 추가검사비용과 수술비를 다 청구했을 것이다. 왜 내가 좀 더 편하게 보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을 때, 왜 반반인 확률을 거듭 강조하며 수술만을 권했을까. 여자는 안락사를 절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집에서, 십년 이상 녀석의 냄새를 묻히며 살았던 집에서 따뜻하게 보내주고 싶었다. 목이 메어 말이 끊어지는 여자에게 냉정한 보호자로 원장은 밀어붙이기만 했다.

 

이미 늦었다.

 

여자는 숨이 끊어진 것을 알고도 오물 묻은 포미의 털을 물티슈로 닦고만 있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담요는 오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여자는 발목 밴드와 수액을 빨리 빼달라고 했다. 병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담요는 버려주라고 했다. 모든 것이 제거되자 여자는 포미를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콧물이 나오고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간호사가 티슈를 건넸다. 그리고는 오물이 나올 수 있으니 패드에 싸서 데리고 가라고 했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 하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반려동물 장례전문기업 ‘펫바라기’ 팸플릿을 건넸다. 남원에 있는데 화장할 수 있단다.
 
품에 안긴 포미는 호흡만 멈췄을 뿐 아직 따뜻했다. 평소대로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털을 하나씩 만졌다. 집에 와서는 녀석이 제일 좋아했던 여자의 작업실 침대에 하룻밤 마지막으로 재우기로 했다. 오물 묻은 털을 닦아주었다. 평소 가지고 놀던, 심심할 때면 입에 물고 오던, 이미 낡아버린 인형을 녀석 품에 안겨주고 새 담요로 몸을 감싸주었다. 서서히 몸이 굳어갔다. 여자는 얼결에 들고 온 펫바라기 팸플릿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집에 있는 세 녀석은 제 아내와 어미가 죽은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와 달리 얌전했다. 화장할 시간을 잡았다.
 
다음날 오전, 여자는 포대기에 싼 녀석을 무릎에 올려놓고 남원으로 향했다. 조수석에는 여자의 딸이 앉았다. 딸은 새벽에 두어 번 포미를 본다고 자다 말고 작업실 침대에 왔지만 생전의 포미와 사체를 구별했다. 사체를 사체로만 봤다.
 
십여 년 간 여자와 같은 침대를 사용했던 녀석이었다. 잠꼬대도 방귀도 잘 뀌던 녀석. 인간관계로 상처받아 유폐되다시피 했던 여자에게 따뜻한 체온을 나눠주었던 녀석. 차가운 여자를 처음으로 동물을 사랑하게 만든 녀석. 뒷다리가 불편해 자궁이 온전하지 않아도 깜찍한 두 녀석을 낳은 애엄마 녀석. 두어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녀석. 이틀 전까지도 간식을 잘 받아먹던 녀석.
 
여자는 시종일관 침착하게 펫바라기에서 진행하는 장례절차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유골함을 무릎에 올려놓고 운전을 했다. 딸과 함께 포미와 공유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이야기했다. 끝도 없는 추억을 되살릴 때마다 여자는 자제하고 있던 술 생각이 간절했다. 

 

욕지도(欲知島) - 누군가의 곁을 떠날 시간을 안다는 것은.

 

▲     ©전남방송

 ▶ 사진1 : 몰려든 어둠 속에 묻힌 욕지도 항구의 밤풍경.

 

그 아이를 본 것은 전날 선착장 근처 식당에서였다. 옆 테이블 손님이 고등어회를 주문했고 능숙하게 회를 뜨던 주인이 대가리와 살점이 붙은 생선뼈를 선착장으로 휙, 던졌다.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뾰족한 턱과 삼각형 귀, 긴 허리, 때가 탄 하얀 털. 그 아이는 가시를 입에 물고 씹기 시작했다. 

 

생선뼈는 위가 작고 약한 강아지에게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곳 사람들과 지형에 익숙하듯 고등어 가시를 먹는 것에도 통달한 듯 보였다. 호기심 어린 식당 손님들의 눈길을 아랑곳 하지 않고 오랫동안 가시를 씹었다.

 

식당 앞 선착장으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먼 바다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왔다. 소주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던 무리도 나갔다. 행인 몇이 녀석 주위에서 아는 척을 했다. 그 손짓에 반응을 하다가는 귀찮은 듯 바닥에 주저앉아 털을 핥아댔다. 바닷가의 햇살과 해풍과 손님과 상점들의 반응에 익숙한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행동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몇 개월 전에 죽은 녀석. 왜 그 순간 이름도 모르는 선착장 강아지한테서 죽은 녀석이 오버랩 되는 걸까. 어둠이 묻은 코발트블루는 우물처럼 깊었고 배 밑으로 몰려드는 짙은 그늘은 비린내를 풍겼다. ‘포미야!’ 절로 내 입에서 죽은 녀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아이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짧은 네 다리로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     ©전남방송

 ▶ 사진2 : 여객선이 닿는 선착장 쪽을 바라보고 있는 떠돌이 강아지.

 

일상생활에서 앞서 간 녀석이 가끔 나타난다. 어느 날 책 정리를 하다가 책장 뒤에서 녀석이 입었던 옷을 발견할 때에는 그런대로 괜찮다. 펫바라기에서 화장한 녀석의 유골을 무등산 약사암이 보이는 새인봉 절벽 아래에 뿌렸다. 가끔 그곳에 앉아 녀석을 그리워했다. 그것은 준비된 슬픔이었다. 내 처연함이 극에 달할 때의 형상 또한 앞서간 녀석의 그리움과 함께 왔다. 내 자신의 오롯한 슬픔인데도 녀석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면서 맘껏 울 수 있는 합리성을 얻었다.

 

눈물처럼 따뜻하고 촉촉하고 짭쪼롬한 해풍이 창밖에서 불어왔다. 통영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15분을 더 달려 삼덕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오십여 분 남짓 배를 타고 욕지도에 발을 디뎠다. 이곳까지 와서 왜 나는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강아지한테서까지 포미를 보는 것일까. 그 아이가 다가오자 나는 식당 야외 테이블 의자에서 일어났다. 양손으로 삼각형 귀 뒤와 턱 아래 털을 긁어주었다. 그 아이는 아무런 경계심 없이 눈꺼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내 손길을 즐기는 듯했다. 털은 엉켜있었고 묵은 냄새가 났다.

 

내가 하룻밤 묵을 숙소는 선착장 식당에서 관청마을 쪽으로 800m 정도 걸어가야 하는 언덕 위에 있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이미 어둠이 내려 선착장 조명이 보석처럼 빛났고 해안선에 자리한 해군기지는 LED 불빛으로 환했다. 내 뒤를 따라 선착장에서부터 따라온 그 아이는 띄엄띄엄 오줌을 뿌려가며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펜션 2층 숙소에 들어왔을 때도 앞 베란다에서 나를 보고 있거나 출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는 출입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조금 열어두었다. 실내로 들어오면 같이 잘 생각을 했다. 펜션 주인에게 알려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꼬투리도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온돌방에 얌전히 깔려 있는 하얀 침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출입구에 앉아 있는 녀석에게 눈길을 돌렸다. 섬 구석구석을 쓸고 다녔을 무성한 털과 언제 씻었을지 모를 발바닥이 확대되었다. 이불에 오줌을 누면 어떻게 하지? 가슴은 그 아이에 대한 온정으로 뜨거우면서도 머릿속은 내 곤란한 처지를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녀석은 내 곤란을 아는지 실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련한 그리움으로 뭉쳐진 감정을, 떠돌이 개에게까지 전가시키고 있는 것일까. 이미지만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되살려내고 있는 것일까. 시간이 가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라면, 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아있는 이에게는 여전한 생채기일 것이다. 그래서 진짜 죽음은 더 이상 그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기억의 소멸은 망각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도 따라 들어간다. 죽은 자의 세계인 하데스(Hades)는 땅 속 깊은 곳에 있다. 망령들은 그곳에서 갇혀 지낸다. ‘나’는 누구였고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의 소멸인 망각을 했을 때에야 진정 ‘나’는 죽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까지 망각을 강요할 수 없지 않는가. 

 

앞서간 녀석이 죽기 하루 전, 탁자 아래에서 아주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눈빛이 원망스러웠다, 라거나 아주 간절하게 구원 요청을 했다, 라고 하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은 역설적으로 죄의식을 덜기 위한 자기 처벌인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음력으로 1월 2일이었다. 돌아오는 봄, 강의가 없는 요일에 지리산 둘레길 완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에 앞서, 지리산 정상은 밟아봐야 할 것 같았다. 백무동에서 천왕봉까지 산행하기로 몇 사람과 약속을 했다. 새벽 4시에 광주에서 출발해야 정상을 밟고 해지기 전에 하산할 수 있었다.

 

첫 지리산 천왕봉 도전을 앞둔 나는 흥분했다. 녀석의 간절한 눈빛을 알아챘다고 한들 살뜰하게 보살펴 줄 여유는 없었다. 겨울 산행의 안전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단순히 평상시처럼 나를 따라오겠다는 눈빛으로 읽었다. 그날 나는 아주 활기차게 산행을 했고 눈보라 치는 천왕봉에서 인증샷을 날렸다. 녀석의 애절한 눈빛이 꿈속에서도 되살아나는 것은 장례식을 치른 뒤였다.   

 

또 다시 캠핑 중에 포미를 잃어버리는 꿈을 꿨다. 나는 그 녀석 이름을 부르며 안개 속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한순간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더니 곧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앗, 그 아이는? 나는 내가 잠들기 전까지 출입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강아지를 떠올렸다. 실은 그것조차 꿈처럼 느껴졌다. 잽싸게 출입문을 열었다. 없었다. 맞은편 베란다로 향했다(너른 베란다는 출입구와 연결 되어 있었다). 그곳에 그 아이가 뒷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헛것이 아니었다. 말똥말똥한 까만 차돌 같은 눈으로 되레 내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다시 잠들어서 눈을 떴을 때도 그 아이는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     ©전남방송

 ▶ 사진3 : 숙소에서 바라본 욕지도 동남쪽의 망대봉과 그 아래 관청마을과 야포마을을 품고 있는 포구주변 풍경. 

 

전날, 욕지도에 도착한 시간은 3시였다. 선착장에 있는 안내센터에 들어가 욕지도 하이킹 코스를 문의했다. 선착장에서 동항리를 지나 남동쪽 해안가 출렁다리까지 다녀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숙소에 배낭을 벗어놓고 오후 늦게 출발해도 충분했다. 나는 센터 벽에 붙어있는 섬 지도를 보며 오른쪽으로 뻗어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 코스를 돌면 몇 시간 정도 걸리느냐고 물었다. 센터 직원은 세 시간 정도라고 했다. 다음 날은 그 코스를 돌면 될 것 같았다.

 

전날 미리 사온 라면을 끓여먹고 여섯시 삼십분에 베란다로 나갔다. 십여 년 전, 은퇴를 하고 서울에서 내려와 펜션을 운영하며 섬 생활을 하고 있다던 주인 내외는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먼 산봉우리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 햇살도 따가울 것이다. 출렁다리를 건너, 옥동 정상, 망대봉, 일출봉을 거쳐 욕지도 동쪽 끝 해안가로 내려오던 어제도 금가루 같은 햇살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해안가 야포마을을 걸을 때에는 양식장 너머에서부터 슬금슬금 땅거미가 졌다. 선착장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부터 이마로 밤바람이 한 움큼 씩 소금기를 묻혀놓고 사라졌다.
 
작은 배낭에 물과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필요한 물건을 챙겨 넣었다. 그 아이는 1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앉아있었다. 밤새 잠은 잤는지, 집은 어디인지, 보살펴주는 사람은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전날처럼 내 뒤를 따라오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     ©전남방송

 ▶ 사진4 : 해질녘 동항리 언덕에서 본 관청마을과 포구.

 

나는 전날 갔던 출렁다리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멈췄다. 오늘 산행은 섬 안내판이 있는 오른쪽 길이다. 대기봉을 거쳐 욕지도 최고봉인 천왕봉(393m)을 올랐다가 태고암으로 하산할 것이다. 숲길이지만 남해바다의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마냥 경치에 홀려서도 안 된다. 해안가 숲길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이다. 해안가를 벗어난 산길은 가파르다. 등산 초입에서부터 나를 앞서 간 아이의 짧은 네 다리 보폭이 힘차다. 다리가 짧아서 산행이 불가능할 거라는 예상을 뒤집는다. 그래도 그 아이가 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싶다.

 

산길을 조금 올라가자 길가 철망 안쪽에 방목하는 흑염소 대여섯 마리가 풀을 뜯고 있다. 새끼 두 마리가 연신 울어댄다. 그 아이는 그곳에 볼일이 있는 양 오랫동안 지체한다. 나만 걸음을 재촉한다. 울창한 나무를 벗어나자 먼 바다에 바위가 떠 있는 듯한 삼여도(三女島)가 눈에 들어온다. 세 여인이라는 뜻인 삼녀도. 용왕의 세 딸이 사모했다던 900년 묵은 이무기가 변한 청년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무기를 사랑하는 세 딸을 바위로 변하게 했던 용왕. 용왕이 노하지 않았다면 삼여도는 없었을 것이고 전설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용왕의 분노는 적절했던 것일까. 삼여도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옥빛 바다에 떠 있었다. 왼쪽에 바다를 끼고 걷는 숲길 끝에 시멘트 길 임도가 나왔다가 다시 흙길로 들어섰다.   

 

욕지도(欲知島)는 예전에 사슴이 많아 ‘녹도’라고도 불리었다. ‘욕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노승과 관련된 설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00여 년 전에 한 노승이 시자승을 데리고 연화도의 상봉에 올랐다. 시자승이 ‘도(道)’에 대해 묻자 노승은 ‘욕지도관세존도(欲知道觀世尊道)’ 즉, ‘도를 알려거든 세존(석가모니)의 도를 보라’라고 말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후세 사람들이 ‘道’를 ‘島’로 와전해 부르게 되면서 지금의 욕지도로 정착됐다고도 한다.

 

▲     ©전남방송

 ▶ 사진5 : 대기봉으로 오르는 길에 나타난 바위 절벽을 강아지를 안고 오르고 있다.

 

흑염소 새끼들을 달래고 왔는지 뒤늦게 그 아이는 나와 합류했다. 반가움도 잠시, 도저히 짧은 네 다리로 오르기 힘든 길 앞에서 멈춰서야 했다. 급경사 바윗길이었다. 밧줄이 한쪽으로 늘어져 있었다. 멈출 수도, 나만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아이를 안았다.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녀석이었다. 녀석의 몸은 따뜻했다.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지인 중에 한 명은 아주 단호하게 없다고 했다. 섬에서 자란 그에게 개는 단지 집을 지키다가 때가 되면 사람들 몸보신으로 육신을 소멸해가는 짐승일 뿐이었다.

 

육체와 분리되는 독립존재인 영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에서부터라고 한다. 영혼과 육체가 별개 존재인 것은 둘의 기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몸은 땅에서 왔고 영혼은 하늘에서 왔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본래 고향인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플라톤의 뒤집기다. 플라톤이 영혼을 하늘로 올려 보내기 시작했다. 몸은 가멸성의 세계에 속하고 영혼은 불멸의 세계에 속하니, 사람이 죽으면 몸과 혼은 분리되어 몸은 땅으로 영혼은 불멸의 세계인 하늘로 간다는 이치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무엇보다 ‘기억의 주체’였다. 몸은 기억이 없고 영혼에만 있다. 영혼이 하늘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은 거기가 원래 제 고향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혼에 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막연한 영혼이라는 개념이 분명 육체보다는 정신, 즉 ‘마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마음은 사전적 의미로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동물은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없다는 것인가.

 

▲     ©전남방송

 ▶ 사진6 : 욕지도의 최고봉인 천왕봉(393m)

 

짧은 네 다리로 따라오기 급급한 아이는 목이 마른지 연신 혀를 내밀며 헉헉거린다. 잠시 쉬면서 들고 온 생수 병 뚜껑에 물을 따라 내민다. 허겁지겁 물을 핥아 마신다.

 

포미를 화장하기 위해서 남원 펫바라기로 향하기 전 딸과 이야기를 했다. 나는 포미를 화장한 뒤 유골함을 1년 동안 보관하고 나서 좋은 곳에 뿌려주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딸은 포미가 여행을 좋아했으니 ‘밖’에다가 뿌려주자고 했다. 나는 딸에게 물었다. “그러면 바다는 어떨까, 제주도 바다?” 야무진 딸이 반론을 제기했다. “목욕하기도 싫어했는데, 헤엄도 못 치고. 산은 어떨까요?” 실은 나도 수영을 못한다. 물도 무서워한다. “한라산? 백두산은 어때?” 화장을 하고 유골함을 내내 무릎 위에 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로 유쾌한 음성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각자 포미와 추억을 회상하며 침체되어 있었던 때였다.

 

“무등산은 어때?” 침묵이 계속 이어졌을 때 나는 딸에게 물었다. 구정 전, 중봉에서 증심사로 내려오는 길에 들었던 약사암의 염불소리가 새인봉 절벽에 부딪쳐 산야를 은은하게 흔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소리에 절로 심취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깝잖아. 보고 싶을 때 훌쩍 갈 수도 있고. 한라산과 백두산은 한번 뿐이야.” 나는 종교는 없다. 하지만 산야의 절과 새벽예불 소리를 좋아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깨우는 도량석(道場釋)은 두말할 나위 없는 신비한 소리다. 경내에서 잘 기회가 있는 날은 꼭, 새벽예불에 참석한다.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날, 유골함을 들고 증심사 주차장에서 내려 한 시간 산을 올라 약사암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 햇살은 먼 곳에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십년 동안 내 옆에서 살아 움직였던 육체가 재가 되어 흘러 날아가고 있었다. 이왕 가족이 된 이상, 태어난 것은 보지 못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켜 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녀석의 자취를 좇으면서 나를 위로했다.

 

▲     ©전남방송

 ▶ 사진7 : 천왕봉에서 바라본 욕지도 덕동마을 해안. 섬처럼 보이지만 본섬과 이어져 있다.

 

포미의 분신인 양 그 아이와 가파른 돌 오르막길을 올라 대기봉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철제 계단이 놓인 천왕봉을 목전에 두었다. 천왕봉의 급격한 오르막 철제 계단을 함께 오른다는 것은 둘 다 위험했다. 다행히 아래에서 그 아이는 나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듯했다.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태고암 쪽으로 하산을 할 때에는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었다. 체크아웃 전에 숙소에서 짐을 챙겨 선착장으로 나올 시간은 넉넉했다. 그 전에 가게가 보이면 강아지 간식거리라도 사고 싶었다. 아침에 라면을 먹으면서 혹시나 그 아이도 배고플 것 같아 스프 묻은 라면 발을 물로 씻어 내밀었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 못하는 아이지만 천왕봉까지 올랐는데 얼마나 배가 고플까. 변덕 심한 내 마음은 기특한 그 아이를 두고 또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집에 데려가면 어떨까. 다른 강아지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렇게 자유롭게 섬 생활을 하는데 아파트 안은 답답하지 않을까. 값싼 연민에 머리가 복잡한 나와 달리 그 아이는 또박또박 땅에 네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 내려갔다. 

 

▲     ©전남방송

 ▶ 사진8 : 강아지와 함께 오른 대기봉 정상 표지목에서 기념촬영.

 

면사무소가 있는 욕지도의 중심 서촌마을로 내려와 욕지도 패총 터를 지나자 대문이 열린 절이 보였다. 폐사였다. 사람의 발길이 끊기고 부서진 건물들과 무성한 잡초가 덮인 황량한 경내를 둘러보고 나왔다. 뭔가 허전한 느낌 때문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내내 나를 따라오던 그 아이가 증발해버렸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나 싶어 살펴봐도 없었다. 혹시 웅덩이나 하수구에 빠진 것이 아닐까. 없었다.

 

▲     ©전남방송

 ▶ 사진9 : 태고암에서 내려오다 만난 산기슭 마을 집들.

 

욕지도를 떠날 배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혹시나 전날 저녁에 처음 만났던 곳에 그 아이가 있을까 싶었다. 숙소에서 부리나케 짐을 챙겨 식당으로 향했다. 짧은 네다리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올 것만 같은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물질을 한다던, 제주도 해녀 출신 아내를 둔, 식당 주인 남자가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른 점심을 주문하고는 그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어제 고등어 뼈까지 던져주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주인 남자는 전복을 손질하는 아내 옆에서 먼 바다를 바라본다. 

 

어느 해 5월 이곳을 찾은 젊은 부부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단다. 그들은 돌아가고 강아지만 남아 선착장을 서성거렸단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오월’이라 불렀단다. 

 

오월아… 나는 햇살에 찰랑거리는 먼 바다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아이도 어엿한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러주지 못했다.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고동 소리는 가까운 데서 들리고 습기 먹은 해풍은 가슴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 욕지도(欲知島)는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에 있는 섬이다. 여행 날짜는 2017년 5월 25일부터 26일까지이며 이 글을 쓰면서 NAVER 지식백과 욕지도 편과 도정일‧최재천의 『대담』(휴머니스트)를 참조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17/09/26 [15:35]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2024년 3월 이달의 추천관광지-영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