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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시와 그림 이야기 8
- 묵언의 기도, 촛불 -
 
화가 한희원   기사입력  2017/03/15 [18:45]

 

▲ 호롱꽃 2010 Oil on canvas 22.7x15.8     © 전남방송

 

등불

 

      새벽에 눈을 뜨는 것은

          삶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잎을 버림으로

생을 다시 사는데

      머리맡의 등불을 켜고

       나의 비움을 생각한다.

                                  등불하나                                            

         조용히 나에게 다가온다.

                         새벽별                                       

                무심히 등불 속으로 떨어진다.

 

  그날은 어두웠다. 어둠이 천천히 다가와 내 곁에 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희미한 추억의 그림자 같은 옅은 기류가 작고 낡은 카페를 천천히 잠식하고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류에 끌려 나는 문을 열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저녁거리의 불빛이 창 안으로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어둠속에서 몸을 반쯤 담그고 있었다. 침묵이 어둠과 섞어져 서성거렸다.

  

  전등불빛이 싸락눈이 내리듯 그 곳의 모든 사물에 내려앉았다. 잠깐, 오래된 중세의 명화 속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명도가 아주 낮은 방안의 소리를 듣는 눈빛들......

어색한 침묵이 자연스럽게 느껴진 것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불빛 때문이었다. 불빛은 하루 종일 바닥이며 벽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같았다.

 

▲ 저녁창 2012 Oil on canvas 34x34     © 전남방송

 

  나는 첫 휴가를 나온 군인 신분이었다. 적당히 살이 올랐고 첫 휴가를 간다고 해서 고참이 닦아준 광이 난 군화를 신고 있었다. 다리미가 없어 관물대의 수반으로 군복 바지에 각을 잡고 한껏 멋을 부렸다. 그렇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어색할 뿐이었다. 아직은 군대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달 동안 떠나 있던 도시의 분위기와도 섞이지 못한 이방인 같은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대학을 늦게 들어갔고 졸업 후 군에 갔으니 첫 휴가 때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강원도 최전방에서 15시간이나 걸려서 나온 첫 휴가였지만 씁쓸한 공허감만 엄습해왔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려서 알 수가 없지만 첫 휴가 때 찾아간 낡은 공간. 계림동 어느 길목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해서 아는 얼굴이 있나하고 찾아간 곳이었다. 저녁이 찾아올 무렵 조용히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몇몇의 젊은 남녀들이 어둠이 소리 없이 밀려오는 카페에서 침묵한 채 앉아 있었다. 나는 한켠에 혼자 앉아 술을 들이켰다.

 

 전등의 불빛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짙은 지류가 걷혀져 갔다. 몇몇의 남녀들은 전남대 미술과를 나온 친구들 같았다. 어렴풋이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군인인 나를 옆에 앉히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대화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침묵으로 어색함을 피해갔다.

 

 그때 오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음악을 듣는데 순간 눈물이 흘렀다. 아주 잠깐이었다. 누구도 알아 챌 수 없는 짧은 눈물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풀잎에도, 사람들의 뒷모습에서도, 오래되고 낡은 벽을 보면서도, 어둠속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 밤 길 1993 Oil on canvas     © 전남방송

 

     (정태춘의 노래 ‘촛불’전문)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창가에 촛불 밝혀 두리라

  외로움을 태우리라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면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이 밤이 다가도록

          사랑은 불빛아래 흔들리며

  내 마음 사로잡는데

         차갑게 식지 않는 미련은

 촛불처럼 타오르네

                

정태춘의 낮고 서정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한 편의 시 같은 노래는 어둠의 쓸쓸함에 매몰되어 가던 내 심정을 들추어냈다.

 

길손처럼 어둠이 찾아오고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릴 때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을 촛불을 보며 달래는

그렇지만 사랑의 미련은 차갑게 식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담양의 허름한 식당에서 정태춘을 만나 소주 한잔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등 뒤에서 수 십 년 전의 희미한 촛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어둠을 빠져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없는데도 오랜만의 고향 길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조금 있으면 강원도 막사를 지나는 소양강에도 봄은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 같은 삶. 자신의 몸을 불태워 주위를 밝히는 삶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촛불은 자신의 몸을 태우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큰 불은 무엇이든지 삼켜버릴 듯 무서운 형상을 하고 소리를 내면서 피해를 주지만 촛불은 속으로 참고 울어버린 미련을 태우면서 불을 밝히니 더 숭고하다.

 

▲ 밤 1993 Oil on canvas 259.1x181.8     © 전남방송

 

촛불

 

                                           촛불이 반쯤 몸을 기울이다.

                                           몸을 일으킨다.

 

                                           타들어가는 몸만큼

                                           사랑은 깊고

 

                                            다비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말이 없다. 

 

                                            온전히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난 후

                                            실체도 없이 내가 사라진다해도

 

                                            촛불은

                                            그대에게

                                            빛으로 남는다.

 

  요즘 곳곳에서 수많은 촛불이 모여 세상을 밝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세상의 모든 별과 꽃이 한꺼번에 피어 있는 것 같아 그 아름다움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만나는 사람 중에 언제나 말없이 지극한 모습으로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소리 없이 떠났을 때 그가 내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촛불도 이와 같으리라. 소리 내지 않아도 자기의 몸을 조금씩 태워 주위를 밝히는 촛불.

 

  봄이 오면 피어나는 꽃들도 촛불과 같다. 언제 피는 지도 모르게 만개하고 언제 지는지 모르게 스러져 가지만 세상이 온통 꽃이 피는 모습으로 변해질 즈음에 우리는 한편의 울컥한 감동의 시를 만나게 된다.

  

▲ 기찻길이 있는 마을 2003 Oil on canvas 40.9x27.3     © 전남방송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에 촛불하나를 켜고 산다. 촛불의 모양이 다르고 그 밝기도 다르다. 촛불을 켜고 걷다보면 거센 바람에 꺼질 듯 위태롭다가도 다시 타오른다. 오랜 시간 미풍에도 흔들림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불을 밝히기도 한다. 완전히 꺼졌다 싶을 때에도 자기 스스로 생을 다시 지피기도 하고, 옆에서 걷는 사람이 호~하고 입김을 불어 넣으면 다시 불꽃이 살아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심지가 다하면 스스로 정지해 영원하지 않는다. 

 

그림자 속의 촛불

 

                                         언제부터인가 가슴 속의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꽃은 피어나서 지고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지

 

                                        가슴 속에 촛불을 켜고 서성거리는 사람들

                                        존재하지 않는 공허의 빈터에 서서

                                        사람들은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서성거리는 그림자 속의 촛불이 세차게 흔들린다.

                                        그대의 촛불은 얼마나 바람의 곁에서 방황하고 타오르고 있는지

                                        눈물 한방울 촛불 속에서 타오른다.

                                        묵언의 기도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불빛은 더 강하다. 내 그림 속에는 유난히 불빛이 많다. 그 만큼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어둠이 없으면 굳이 빛이 필요 없으리라.

  

 여러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촛불을 닮은 사람이 예술가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을 불태워 주위를 밝힌다. 화가 손상기는 세 살 때부터 구루병을 앓아 척추만곡이라는 불구의 몸이 되었다. 나중에는 폐울혈성 심부전증으로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개복 수술을 하여 나을 수 있었겠지만 불구의 신체로 인해 화가 손상기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그는 고통을 겪는 아픔만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이웃의 따뜻한 시선이 언제나 들어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영혼의 아픈 갈망을 통해 인간에게 위로를 주는 불빛을 안겨준다.

 

 <적막>

 

    꽃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매화꽃 강변에 떨어지는 소리

           햇빛이 아침 강가에 내리는 소리

               바람이 그늘에 앉아 손짓하는 소리

  그대의 낮고 깊은 숨소리

           아!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적막의 순간이 그립다.

   거리에 사람들 다 떠난 후

  고요함이 거리를 걷는다.

                  바람이 멎고 어둠이 길게 드리웠지만

             언덕 너머로 심연은 밝게 빛난다.

       마음으로 그대에게 걸어가는

                                              짙은 적막이 그리운 날.

 

  3월이 왔는데도 가끔씩 눈이 내려 정신을 들게 한다. 대지를 간신히 뚫고 나온 풀잎과 노인의 팔뚝 같은 나무 등결에 피는 매화나무의 순백한 잎 위에도 눈이 쌓인다. 봄날의 차가움은 예기치 못함으로 더 가슴 깊이 박힌다. 한 인간의 생은 찰나처럼 짧다. 찰나의 시간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긴 시간이다.

 

▲ 호롱불, 그리움 2007 Oil on canvas 33x45     © 전남방송

 

내 가슴에 켜진 촛불이 어느메쯤 타오르고 있는지 이제는 살펴봐야겠다. 오늘 밤에 정태춘의 ‘촛불’을 불러 봐야겠다.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나를 내버린 내 님 생각에......

 

▲ 호롱별빛이 있는 마을 2007 Oil on canvas 53x40.9     © 전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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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15 [18:45]  최종편집: ⓒ 전남방송
 
임경순 17/03/16 [10:11]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 - ^
햇살좋은 17/03/18 [14:35] 수정 삭제  
  세상에 따뜻한 빛이고자 하시는 마음 따뜻하신분~ 진달래가 수줍게 얼굴을 붉힌 산길을 걷는 이 시간 정태춘 박은옥의 촛불을 흥얼거리며 지난날의 그리움이~~
speer 17/03/18 [20:26] 수정 삭제  
  조곤조곤 말을 건네는 한 밤의 호롱불..같은 선생님의 이야기와 그림들에 감사드립니다~
김혜숙 17/03/19 [06:50] 수정 삭제  
  한선생님의 글에서 빛과그림자 를 함께 느낄수있고,세상속에있는 자신의 소박하고 정겨운작가의 마음과 영혼의세계가 보여집니다! 용서와이해의 너그러운마음의 소유가 예술로 승화되어 희망의 봄을 맞게하는군요! 인간적이고 소박한음악과의 어우러짐이 평안함을 주는군요! 감사합니다 ^^~~~
스침 17/03/21 [08:31] 수정 삭제  
  추억은 현재를 토닥토닥 다독여 주는 아름다운 손길입니다. 한희원 님의 따스한 글! 통째로 고향길 옮겨와 두 눈 감고 미소 짓고 있습니다. 나를 품어주는 추억을 들춰내 줘 참 고맙습니다 늘 같이할 수 있으면 참 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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