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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전은행
【고물 삽니다】, 【밥 같은 시를】, 【미쓰리】, 【가난의 껍질】, 【우리 엄마】수록
 
김정현 기자   기사입력  2017/03/02 [19:05]

시인 전은행

【고물 삽니다】

 

 고물 삽니다 고물

텔레비 삽니다

고장 난 컴퓨터 삽니다

세탁기 삽니다

냉장고 삽니다

은수저 삽니다

금이빨 삽니다

안 쓰는 재봉 털 삽니다

고물 삽니다 고물

텔레비 삽니다

고장 난 컴퓨터 삽니다

세탁기 삽니다

냉장고 삽니다

은수저 삽니다

금이빨 삽니다

안 쓰는 재봉 털 삽니다

고물 삽니다 고물

평온한 아침

허공을 치는 고물 트럭의 반복되는

녹음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새삼 저들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는다

만약 우리네 인생이 고장 난다면

누가 저렇게 찾아다니며

우리를 사겠다 외치겠는가

 

【밥 같은 시를】

 

고슬고슬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같은 시를 나는 쓰고 싶다

찰지고 말랑한 밥 한 숟가락 같은 시

목구멍으로 넘기면

온몸이 따뜻해지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추운 겨울

시장 좌판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나이 든 아주머니 손에 들린

따근한 밥 같은 시를 나는 쓰고 싶다

뜨거운 그것을

한 숟가락 입에 넣어 호호 불며

세상 따뜻한 말은 다 쓰고 싶다

남녀노소 누구나 먹는 밥 같이

물리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는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시를

나는 쓰고 싶다

 

【미쓰리】

 

미쓰리는

짧은 치마에

망사 스타킹을 신고 있었어요

미쓰리가

시골 작은 이발소에 온 후부터는

온 동네 사내들이 마치

발정 난 강아지 마냥 이발소에 들락거리며

실실 웃고 다녔지요

날이 시퍼렇게 선 면도날을

가죽끈에 쓱쓱 문지르고

얼굴과 목에 하얀 거품을

바르며 면도를 시작할 때면

가슴이 벌렁이며

목숨 줄이 왔다 갔다 했지만

사내들이란 망사 사이로

드러난 미쓰리의 허벅지에

침만 꼴깍꼴깍 삼켰지요

미쓰리가 머리를

감겨 줄 때나 면도 중에

미쓰리의 봉긋한 가슴이 얼굴에

닿기만 하면 사내들 마음에

힘이 솟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요

면도가 끝나고

미쓰리가

뜨거운 수건으로

얼굴을 감쌀 때면

다리가 풀려 걷기 힘들어했어요

미쓰리

미쓰리는 아직도

어느 동네 할아버지의 목숨줄을

조이며 면도를 할까요?

 

【가난의 껍질】

 

 보리쌀 섞인 쌀을

한 되 사서

산동네 판잣집에 다다르면

엄마는 잘 벗겨지지도 않는

도라지 껍질을 한숨으로 볏겨 내고 계셨다

하루 종일 도라지 껍질을 벗기느라

온몸이 뒤틀려도

도라지 살점이 제 살점 인양

껍질에 딸려나가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다

연탄 두장을 세숫대야에 이고 가면서도

한겨울에 방이 따뜻하지 않은 이유가

가난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엄마를 이해했을까

코딱지 만한 작은방이

꼭 막은 연탄 불문만큼

어둡고 갑갑해도 가난임을 모르고

그저 쌀 한 되 사는 것만 부끄러웠다

세월이 흐른 지금

엄마가 벗기고 싶었던 건

도라지 껍질이 아니라 가난이 아니었을까

지난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

산동네 판자집의 숭숭 거리는 바람소리처럼

스산합니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의 한소절을

노래해 봅니다

 

【우리 엄마】

  

전라도 사람이 와서 밥을 먹으면 고향이 전라도가 되고 충청도 사람이 와서 밥을 먹으면 고향이 충청도가 되는 우리 엄마 팔도를 떠돌다 아침 밥 못 먹은 사람에게

한 그릇 뜨거운 국밥으로

생기를 찾아주는 우리 엄마는

천상 그들의 어머니다

 

화장을 안해도 뽀얗던 얼굴

하얀 분칠을 하면 더 예뻣던 그 얼굴이

어느새 주름이 자글거리고 웃을 때 마다 보이던 금니 마져 빛을 잃었다

텅빈 남의 창자를 채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남의 허기를 채우는 일로

아픈곳이 늘어 날 때 마다

뜨거운 눈물 흐른다

그래도

삶으로 밥을 지어

먹고 사는 일에 평생을 바친 위대한 여자

쿡쿡 쑤시는 삶에

나는 진통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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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3/02 [19:05]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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