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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 소설가의 섬으로 떠나는 완행열차6>
 
차노휘 박사 칼럼   기사입력  2017/01/03 [07:46]

 

차를 타고 지나친 곳은 말 그대로 지나칠 뿐이다. 발을 딛고 설 때, 걸음을 옮길 때 비로소 그곳에 가보았다고 할 수 있다. 뭍이 아닌 섬에서 나는 걷는 법을 배운다. 공간의 한계가 분명한 섬은 차로 지나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걸으면서 해풍을 맞고, 갯내음을 들이키며 사람들을 만날 때 섬은 제 모습을 보여준다. 걷는 것은 느리게 사는 것이었다. 느리게 살면 놓치고 있는 것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청산도에서 나는 느리게 걸으며 내안의 나와 조우했다. 품고 있던 많은 것들이 하나씩 얘기를 걸어왔다.

 

청산도(靑山島) - 한을 넘는 그 무엇

 

▲     © 전남방송

                                          <서편제 쉼터에서 바라본 풍경>

 

광주에서 2시간 달려서 완도항에 도착했다. 풍랑이 거세 청산도로 가는 오전 배는 뜨지 않았다. 오후에도 바람이 거칠긴 마찬가지였다. 짙푸른 코발트 빛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온 바람은 짠내를 동반했다. 짠내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는데 그것은 늘 생선비린내와 함께였다.

 

어렸을 적에 맡았던 엄마 몸 냄새는 생선비린내였다. 캐러멜 향도 날 수도 알사탕 맛도 맡아질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생선비린내일까. 그 냄새는 직접적으로 맡았다고 하기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관념적으로 굳어진 향이었다. 하지만 커서, 내 몸에서도 생선비린내를 맡았다. 땀이 말라서 나는 냄새였다. 엄마는 늘 일에 매달렸다.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아버지랑 못 살겠다며 하나는 등에 업고 둘은 양손에 하나씩 잡고 딸 셋을 데리고 이모집에 갔단다. 엄마의 언니 집인 이모집은 일종의 가출 여정의 첫 번째 정거장 정도였을 것이다. 집 나왔다는 말도 못하고 저녁상을 받고 하룻밤을 자고나서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딸들이 걸렸단다. 아이들이 어렸고 이모집에서도 눈칫밥을 먹는데 다른 데서는 얼마나 더 할까도 싶고. 뒤돌아보니 자꾸 걸리는 것이 많아서 하룻밤만 자고 들어 와버렸단다. 그런 뒤 당신은 오십여 생을 떠나지 않고 한곳에서 살아내고 있다.

 

오십 여분 동안 온돌방 같은 따뜻한 선실에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청산도 도청항에 도착했다. 겨울인데다 평일이어서 관광객이 없었다. 두세 시간 뒤면 해가 질 것 같아, 걷기는 내일로 미루고 버스를 타고 섬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에 두 번 운행한다는 버스투어는 관광객이 없다는 이유로 운행하지 않았다. 서운할 것은 없었다. 애초 계획대로 걸으면 됐다. ‘느림의 종’이 바다를 향해 걸려있었고 나는 그 종을 한번 치는 것으로 청산도에 내가 온 것을 알렸다. ‘청산 도락어촌 체험마을’이라는 입석이 느림의 종 뒤로 세워져 있었다. 청산도 슬로길 제1코스가 시작되는 곳이다.

 

청산도 슬로길은 청산도 주민들의 마을 간 이동로로 이용되던 길을 제주도 올레길을 본떠 만들었다(2010년 전체 11코스(17길) 42.195km). 바닥에 파란색 화살표시와 물고기 모양의 나무 이정표, 달팽이 형상 안에 그려진 코스별 지도 그리고 입간판으로 방향을 표시했다. 다 걷고 나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청산도는 산,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청산(靑山)이라 부른다. 자연경관이 유난히 아름다워 예로부터 청산여수(靑山麗水) 또는 신선들이 노닐 정도로 아름답다 하여 선산(仙山), 선원(仙源)이라고도 했다. 푸른 바다, 푸른 산, 구들장논, 돌담장, 해녀 등 느림의 풍경과 섬 고유의 전통문화가 어우러져 1981년 12월 23일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 2007년 12월 1일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되어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     © 전남방송

                                                      <도락안길 돌담>

 

해안길에서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된 도락리 안길로 들어섰다. 도락리 안길은 집과 집 사이의 길과 밭길로 이루어졌는데 마을길은 대부분 돌담길이었다. 돌담에 그려진 그림들, 담장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넝쿨 줄기, 비스듬한 오후 햇살, 옹기종기 밭에 심어진 배추들. 평화로운 풍광과 달리 바람이 골목으로 들어왔다가 바다로 물러갈 때 멀리서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두어 번 울고 말 거라는 생각과 달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슴 저리게 울부짖는 소리가 절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울음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 것도 아닌데, 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축사 앞이었다. 축사 주인 남자가 나와서 여기는 사유지라고 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사내가 가리켜준 대로 발길을 돌렸다. 혹여, 누렁이 황소가 해산의 진통으로 울부짖는 소리였을까. 이방인을 경계하는 역력한 사내의 눈빛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빨리해서 마을을 통과했다. 해안가를 끼고 있는 도락노송길이 나왔다.

 

▲     © 전남방송

                                          <도락노송길에서 올려다본 서편제길>

 

도락노송길에서 오른쪽 능선을 올려다봤다. 해안가에서부터 능선 위로 좁은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있었다. 능선 위에는 스러져가는 잡풀 한 가운데 사철 푸른 나무 몇 그루가 중심을 잡기라도 하듯 서 있었다. 길가로 전봇대가 띄엄띄엄 서 있고 다랑이 논밭이 추수 끝낸 빈 들녘을 드러내놓으며 하늘거리는 억새풀과 어울려졌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그 유명한 《서편제(1993년작, 임권택 감독)》를 촬영했던 서편제길이 나타났다.

 

청산도로 오기 전 《서편제》를 일부러 찾아서 보고 왔다. 꼭 그래야 청산도에 올 수 있는 기본적인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았다. 영화는 이청준의 소설이 원작이다. 일정한 수입 없이 떠돌면서 살아가는 소리꾼 유봉, 그 소리를 물려주고자 데리고 다니는 송화와 동호의 삶을 다루었다.

 

자존심이 강한 유봉은 유난히 소리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는 송화가 한 맺힌 소리를 내게 하려고 눈까지 멀게 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판소리는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던 때라 그들의 삶은 고단하기 그지없었다. 동호는 그 가난이 싫어서 끊임없이 뛰쳐나가려고 했다.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갈등이 터질듯 말듯 할 무렵, 이 세 사람은 돌담 황톳길을 걸어가면서 진도아리랑을 부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흥에 겨워 모든 시름이 일순간 탁, 놓게 만드는 몸동작과 소리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내 흥겹게 만든다.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 장면은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으로 꼽힌다. 5분 30초에 걸친 롱 테이크가 촬영된 곳이 바로 당리마을입구 서편제길이다. 원래 그렇게 길게 찍을 계획은 아니었으나 감독이 장소가 너무 좋아 바꾸었다고 한다.

 

▲     © 전남방송

                                    <이른 아침에 본 당리마을 입구 서편제길>

 

허벅지에 힘을 주고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막 기울기 시작한 햇살은 사선으로 능선 위와 구불구불한 시멘트 길을 비추었다. 저무는 오후 햇살과 같은 청산도의 겨울은 가식 없는 민낯처럼 보였다. 능선 위에서 본 서편제 길 또한 겨울바람이 화사한 것들을 벗겨놓아서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집 나갔을 때의, 젊은 엄마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싶어 가슴이 아려왔다.

 

“이 서편제 소리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슴속에 첩첩히 쌓여서 응어리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다.”

 

살아가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유봉의 말을 요즘 세대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다들 있지도 않은 한을 풀려고 산다. 남들보다 앞서려하고, 보다 풍족해지려고 전력투구한다. 그렇게 내달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한 발자국도 앞서나가지 못한 그 자리이거나 아니면 오히려 몇 걸음 뒤쳐져 있다. 그럴 때 문득 가슴이 아려온다. 그래서 서편제 속 유봉의 말은 틀린 것 같으면서도 맞다. 세 아이를 데리고 가출했다가 되돌아와 50년을 살아온 엄마처럼 말이다.

 

▲     © 전남방송

                                                       <서편제 영화 한 장면>

 

서편제길 바로 아래에 바다와 도락마을을 조감할 수 있는 서편제 쉼터로 향했다. 초가지붕을 얹은 집인데 그 옆에 주막도 있다. 비수기라 장사는 하지 않는다. 그곳 마루에 앉아 잠시 쉬면서 조금 전에 걸어왔던 길을 내려다보았다.

 

“이놈아 쌀 나오고 밥 나와야만 소리를 하냐, 이놈아?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은, 황금보다 더 좋은 게 소리란 말이여? 이놈의 새끼, 대가리가 컸다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나불대?”

 

“운다고 목이 풀리냐? 그렇게 잠겼다 풀렸다 하면서 목을 얻어가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상성은 지르지 말고 중성과 하성으로 목을 살살 달래도록 혀.”

 

“이제 제법 니 한을 소리에 실을 수 있게 되었구나. 송화야, 내가 니 눈을 그렇게 만들었다.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사무쳤을 텐데, 그런 흔적이 없더구나. 이제부터는 니 소리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해라.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고 말한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 하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은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소리에 득음의 경지가 있다면 글에서 득음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그 득음의 경지가 꼭 한을 필요로 한다면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여정은 곧 한을 만드는 과정이란 말인가.

 

유봉이 송화와 동호에게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지는 햇살과 함께 발밑에서 맴을 돌았다. 나는 몇 가지 상념과 물음표를 남겨두고 서편제 쉼터에서 일어섰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걸어도 될 길이었지만 쉽게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것 또한 알아서다. 그리고 갈 길이 멀었다.

 

서편제길 끝에 ‘봄의 왈츠’ 드라마세트장이 세워져 있다. 그 아래로 슬로길 제2코스가 계속 이어졌다. 당리재에서 구장리로 이어지는 제2코스는 낮은 돌담 바깥에 억새풀이 사납게 자라있는 돌담길로 해안으로 뻗어있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겨울, 늦은 오후의 마른 수풀이 우거진 길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산적이 나타나 배낭을 채가도 이상할 것 없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었다. 간혹 파도소리가 박자를 맞춰줄 뿐이었다.

 

위험구간이라는 푯말이 세워진 해안 낭길을 따라 걷다가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거친 몽돌이 해안가를 점령했다. 빈 블록건물에 잎 떨어진 넝쿨이 마지막 저문 햇살을 받고 있었다. 마을이긴 했지만 본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민박집인 듯한데 사람이 없어 주인이 상주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2코스를 지나 3코스 끄트머리로 합류하여 4코스 초입에 들어섰을 때 선택을 해야 했다. 이곳에서 더 걸어가야 할 것인지, 예약해놓은 펜션 주인에게 전화를 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 것인지를. 예약한 곳은 1코스인 도락마을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낯선 섬은 어둠이 빨리 몰려와서 사람을 두렵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두려움에 몸을 맡기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     © 전남방송

                                    <제2코스 종점인 몽돌해변가의 빈집>

 

꿈속이었다. 바람이 창문을 뒤흔들었고 둔탁하면서도 날카로운 소 울음이 섞여 들렸다.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옷도 걸치지 않고 걸었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바다를 덮었고 해안가에 검은 그림자처럼 황소가 서 있었다.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꼬리에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내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까, 황소가 뒤돌아봤다. 불빛도 없는데, 황소의 눈가에 맺힌 피눈물이 선명하게 보였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자는 둥 마는 둥, 침대에 뒹구는 시간이 아까워 오랜만에 챙겨온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옷을 챙겨 입고 밖을 나섰다. 전망 좋은 2층 펜션이었고 1층으로 내려간 계단은 어울리지 않게 나이트클럽 조명판 같은 것이 붙어있었지만 그 아래가 배추밭이었다. 배추밭은 인가주택이 있는 곳까지 펼쳐져 있었고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싱싱하게 푸르렀다.

 

푸른밭으로 어둠이 넘실거렸지만 그 싱그러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전날 낮에 간 사육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다시 황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부리나케 아래로 내려갔다. 악몽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펜션주인내외가 가르쳐준 아침 산책길을 걸을 참이었다. 도락노송길을 따라 방파제가 보이는 그 끝까지 갔다가 다시 서편제길로 들어섰다. 당리마을 입구를 서성거리다가 갤러리가를 거쳐 도락마을로 들어섰다. 어제 걸었던 슬로길 제1코스 복습이었다.

 

▲     © 전남방송

                                                    <도락마을 새벽>

 

펜션 주인이 전날 픽업했던 장소에 다시 내려주자, 황소 울음소리에 쫓기기라도 하듯 두 발을 놀렸다. 제3코스는 마을길로 들어서는 길이라 낭길인 제4코스를 선택했다. 구장리에서 권덕리까지 이어지는,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 모호한 경계선을 따라 걸어가는 낭떠러지 길이었다. 낭떠러지 아래는 바다였다. 낭길의 해안절벽 같은 절경을 걷다가 잠깐 산속으로 들어온 듯 따뜻하기도 했다. 뒤로 알게 된 것이지만 그 길을 ‘따순기미’라고 한다. 따순기미는 해식작용에 의해 깊게 패인 골짜기 지형으로 추운 겨울에도 바람이 닿지 않도록 주변 지형이 막아주어 따뜻한 기운이 감돌아 따순기미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뜻한 온기’라는 의미가 따순기미일까. 펜션주인이 아침 식사를 하면서 황소 이야기를 꺼냈다. 왜 황소가 우는지 내가 물어본 뒤였다.

 

어느 마을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단다. 이웃에도 노인이 살았는데 그 내외가 자주 도시에 있는 자식들 집에 가곤 했단다. 자식들 집에 가면서 집에 있는 송아지 밥을 할머니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송아지에게 밥을 주면서 옆에 앉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했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마음 속 외로움까지 털어놓으며 말동무를 했던 것이다. 몇 년 뒤 할머니는 죽었고 그 송아지는 황소가 되었다. 황소는 밭에서 일하고 돌아올 때마다 노인 내외를 이끌고 할머니 묘로 갔단다. 그리고 묘 주위에 난 잡초를 말끔히 뜯어먹었단다. 잡초가 자랄 때마다 황소가 가서 할머니 묘 잡초를 뜯어먹었단다.

 

짐승도 자신에게 정성을 다한 사람을 잊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황소가 며칠 째 왜 우는지 답변해주었다. 며칠 전에 송아지를 팔아버렸다고, 그래서 그 어미 황소가 저렇게 울고 있다고 했다. 펜션 주인 남자의 말은 내 가슴을 아프게 쳤다.

 

짐승도 새끼를 빼앗겨 저리 며칠 째 울부짖고 있는데 사람이야 오죽할까. 아니 짐승이라고 그 아픔의 깊이가 사람만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라면 헤어짐의 아픔을 공감할 것인데, 지금도 광장의 노란 슬픔은 추위에도 촛불을 밝히고 있는데, 그 아픔의 방관자들은 슬픔을 느낄 수 없는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심장 없는 거죽만 둘러쓴 좀비란 말인가.

 

제5코스인 권덕리 마을회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온 몸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걷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도 했고 이제부터 슬슬, 말탄바위를 지나 범바위까지 가야할 오르막길이라, 숨도 골라야했다. 나는 잠시 서서 쉬어가기로 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다소 거리를 두고 어렸을 적 엄마를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 직접적인 감정이 얽히기 보다는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끊임없이 어린 엄마와 늙은 엄마를 비교해댄다.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감성적인 에피소드 몇 개가 나열되고 하는데 그중 하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배가 아팠던 나는 늦은 밤이라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엄마는 넓적한 손으로 조그마한 배를 밤새 주무르며 흥얼거려주었다.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가자는 희망적인 말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낮게 흥얼거리던 소리에 스르르 잠이 들었고 다음날 일어났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내 배는 말짱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훌쩍 건너 뛰어 결혼하고 임신했을 때였다. 유산기가 있던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한의원에 가서 맥을 짚어보고 한약을 지었다. 갈 때는 버스 빈 좌석이 넉넉하더니 돌아오는 길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는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새치기 하여 겨우 하나 남은 자리를 확보했다. 어머니의 거친 행동에 머쓱해진 나를 기어코 확보해놓은 자리에 앉히고는 내가 앉은 등받이와 앞좌석 등받이에 양손을 짚고는 철저하게 밀려드는 승객들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아이를 낳고 뒤늦게 학업을 이을 때도 아무런 잔소리 없이 아기를 봐주고 갈 때마다 책을 사라며 혹은 납부금 내라며 비자금을 꺼내주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꺼내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     © 전남방송

                               <범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범바위>

 

▲     © 전남방송

      <범바위 전망대 데크에 설치된 느림 우체국. 이곳에서 편지를 보내면 1년 후에 도착한다고 한다.>

 

끝도 없는 바다가 말탄바위 주차장까지 올라가자 시야를 덮쳤다. 범바위로 올라가는 능선길이 아래로 향했다가 오름막을 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어찌나 불었는지 길가 나무는 잎이 다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몸을 낮췄다. 그래도 저렇게 꼿꼿하게 서서 숨 쉬고 있는 생명은 참으로 강인하게 보였다.

 

살아가는 것이 한이라면 한을 쌓은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면, 분명 살아가는 것이 한을 푸는 것이며 한을 풀어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반어법도 성립할 것이다. 생명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도 강하다. 아무리 혹독한 바람이 불어도 진실의 방향으로 몸을 돌릴 줄 알기 때문이다.

 

권덕리에서 청계리까지 이르는, 보적산 8부 능선을 오르는 길에 범바위가 있다. 호랑이가 바위를 항해 포효를 했더니 바위의 울림이 자신의 소리보다 크게 울리자 이곳에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다 생각에 놀라 섬 밖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범바위로 오르기 전, 나도 큰 호랑이가 되어 포효를 해본다. 내 속의 비겁함들을 모아 크게 밖으로 내보낸다. 되돌아오는 더 큰 소리에 놀라 내 속에서 도망쳐버렸으면 좋을 비겁함들. 겨울이라 사람이 없어서 아무리 괴성을 질러도 나를 이상하다고 둘러보는 사람은 없다. 바람이 불어선지 핏대를 세우고 괴성을 질러서인지 땀으로 젖은 뺨으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래도 실실 웃는다. 실연당한 듯한 햇살과 바람이, 범바위로 향하는 오솔길 같은 능선길이 전부 내 것 같아서 말이다.

 

범바위를 지나서도 나는 구들장길과 다랭이길을 걸어야하고 상서리 돌담길에서 사색을 해야 하며 억새풀 길을 따라 신흥리 풀등해수욕장에 도착해야한다. 그곳에서 승강장이 나올 때마다 경적을 울리며 버스가 왔다는 신호를 보내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시 도청마을로 향해야한다. 그곳에서 이곳 출신 화가의 작품 벽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걸을 것이다.

 

큰 호흡을 하고 범바위로 향한다. 한 호흡 한 호흡 아껴가며 걷는 내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     © 전남방송

<슬로길 제2코스에 있는 초분. 초분은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 풀 등으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고 2~3년 후 뼈를 골라 땅에 묻는 무덤 형태이다.>

 

▲     © 전남방송

 <슬로길 제6코스인 구들장논과 다랭이논길. 구들장논은 구들을 깔듯 논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은 쌓아 만들었으며 다랭이논은 경사진 산비탈을 개간하여 층층이 만든 논을 말한다.>

 

※ 청산도(靑山島)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있는 섬이며 완도에서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섬이다. 완도항에서 뱃길로 50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청산도를 여행한 날짜는 2016년 12월 7일부터 8일까지이며, 이 글을 쓰면서 NAVER 지식백과 홍도 편과 임권택의 《서편제(西便制)》(이청준 원작, 김명곤 각색)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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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1/03 [07:46]  최종편집: ⓒ 전남방송.com
 
현아루 17/01/03 [10:59] 수정 삭제  
  덕분에 청산도길을 저도 다녀간 느낌입니다. 그리고 옛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차작가님의 글은 진솔해서 늘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황교안 17/01/03 [13:04] 수정 삭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섬 청산도를 찾아 걸은들 차작가님 글에서 얻은 그정도의 정서를 얻고 올 수 있었을까.. 글은 그래서 위대한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고 공감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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